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길은 추상과 구체의 양면성을 가진 단어다. 우리가 걷거나 교통편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사통팔달(四通八達)로 나 있는 가시적인 물상(物像)이 길이다. 인도나 보도, 자전거 전용도로나 국도나 고속국도 혹은 철도를 본보기로 들 수 있다. 물과 바다, 하늘에도 길은 있다. 일컬어 수로와 해로 그리고 항로라 한다. 둘 다 길인데 도(道)와 로(路)로 나누어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 무슨 까닭이 있을 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기막힌 명제를 남긴 공자에게 도는 필생의 목표였다.

노자의 명저 ‘도덕경’에는 도와 덕의 의미와 작용원리 및 쓰임새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여기서 도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오랜 세월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근본방책으로 도를 추구해왔다. 따라서 도에는 추상과 구체의 양면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21세기 인공지능 로봇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인간은 추상적인 의미의 ‘도’를 상실했다. 의도적으로 내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도가 이젠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에 길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나날이 깊어져 간다. 2023년의 첫날인 1월 초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승용차와 고속버스, 열차와 비행기, 선박편으로 해돋이를 보려고 길 떠났는지 우리는 안다. 그들에게 길은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길을 걷노라면 인도가 갑자기 사라진다. 차도는 멀쩡한데 인도는 오간 데 없다. 한국의 길은 자동차와 기업체를 위해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수많은 학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차도는 있는데, 인도나 보도는 차도에 밀려나 수줍게 고개 숙이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크고 작은 인명사고가 잇따른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부근에서 인도 없는 차도를 걸어가던 아이가 승용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도 일어났다.

농촌에 사는 나는 두려울 때가 적잖다. 시골길에는 가로등도 한적하다. 그러다 한밤중에 느릿하게 달리는 경운기나 자전거 혹은 보행자와 느닷없이 마주치는 수가 있다. 등골이 서늘하다. 왜 국토교통부는 야광 표시기가 없는 경운기와 자전거 판매를 아직도 허용하고 있는가. 캄캄한 길을 달리는 승용차가 경운기나 자전거와 추돌하는 장면을 국토부 관료들은 상상이나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야광 표시기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의무화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30년 전 도이칠란트를 유학할 때 타고 다니던 자전거는 밤이면 전조등이 빛나고,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을 받으면 타이어에 부착된 야광 표시기가 초록과 노랑과 빨강으로 환하게 반짝였다. 거리도 밝았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의 안전장치가 거의 완전하여 자동차와 자전거의 추돌과 충돌은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런데 선진국 타령하는 대한민국 국토교통부의 관료들은 여전히 경운기와 자전거의 안전장치에는 전연 무심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가 존립하는 제1과 제1장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공무원이라면 자신이 맡은 최소한의 책무라도 수행하면서 연봉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