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저마다 제 이름값을 한다. 뚝 떨어진 기온 탓에 두꺼운 외투 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겨울.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도 이제 끝을 보이고 있다.

몸만이 아닌 마음까지 추워지는 이 계절.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인간에겐 육체와 정신을 데워줄 위로가 필요하다. 그 위로의 주요한 재료가 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사랑’과 ‘희망’이 아닐지.

고래로부터 시인은 언어의 조탁을 통해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왔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세밑. 차가운 세상과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시집 3권과 만나보는 건 어떨까?

 

사랑 때문에 울 수 있어야 시인
박철 ‘사랑을 쓰다’

‘김포행 막차’와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의 시인 박철이 사랑을 노래한 시만을 골라 묶은 책이 있다. 이름하여 연시집 ‘사랑을 쓰다’. 거기엔 아래와 같은 눈물 어린 사랑 노래가 가득하다.

끈이 있으니 연이다/묶여 있으므로 훨훨 날 수 있으며/줄도 손길도 없으면/한낱 종이장에 불과하리/눈물이 있으니 사랑이다/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며/내가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이다/날아라 훨훨/외로운 들길, 너는 이 길로 나는 저 길로/멀리 날아 그리움에 지쳐/다시 한 번/돌아올 때까지.

-위의 책 중 ‘연’.

이미 100년 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말했다. “혼자서는 절대 저지르지 못하는 죄가 사랑”이라고. 박철 역시 발레리처럼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 익숙한 시인.

하여, 그는 연과 끈, 눈물과 아픔, 날아오름과 지상의 길을 짝지어주며 사랑을 노래한다. 두 존재의 합일을 통해서만이 온전히 실현되는 사랑이라는 극적인 사건.

그렇게 실현된 사랑은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박철은 시력이 35년인 문단의 중견. 하지만, 여전히 소년의 미소를 지닌 사람이다.

때론 간명함이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아름답다. 번지르르한 수백 마디의 말보다 자신 앞에 앉은 누군가에게 맑은 물 한 잔 따라주며, 그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 진실한 사랑이란 바로 그런 소박한 정적(靜寂) 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지.

사랑 때문에 눈물짓는 사람이 드물어진 시대. 시집을 읽은 가수 김창완은 박철이 “초등학교 학생 같은 순수한 사람”이기에 “울지 않도록 안아 주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시간을 들여 ‘사랑을 쓰다’ 속을 산책한 기자 역시 같은 생각이다.

시인이란 천형처럼 주어진 말간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지도 없이 혼자 먼 길을 가는 사람. 사랑이 그를 울릴지라도, 세상에서 저 혼자만 서러울지라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 운명을 박철은 이렇게 노래한다. 이 차가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는 ‘꽃잎을 열면’이라는 시다.

그대의 꽃잎을 열면 푸른 하늘/비 개인 맑은 날/붉게 타는 그대의 숲 속을 헤매이다/꽃잎을 열어 목을 적시면/어두운 세상/나만 홀로 서럽다.

 

절망 속에 숨은 희망을 찾아서
국내외 시인 50명 시모음 ‘설운 서른’

누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른은 서러운 나이”라고 선언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30세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서글픈 나이다.20대의 정열이 걷힌 메마른 시기. 꿈과 낭만, 이상과 희망보다는 일상과 현실에 가까워지는 나이. 앞으로 다가올 40~50대 지지부진한 삶에 대한 걱정으로 움츠러드는 때.

세상과 인간을 읽는 ‘예민한 촉수’라고 할 시인들이 이처럼 서러운 나이 서른을 그냥 두고 넘길 리 없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시인들은 바로 이 ‘문제적 나이’ 서른을 각자의 방식과 목소리로 노래해왔다.

‘설운 서른’도 그 연장선에 있다. 국내외 시인 50명이 서른에 관해 쓴 시를 모은 것이다. 딜런 토마스와 잉게보르크 바하만에서부터 천양희와 최승자, 여기에 서른 즈음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작품까지 담긴 시집 ‘설운 서른’. 그들은 각자의 스타일로 서른에 관해 읊조린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 송재학은 서른을 ‘더러운 청춘의 끝’으로 정의하며 아래와 같은 음울한 노래를 부른다. ‘노을’이란 시다.

나는 더러운 청춘의 끝에 서서 부글거리는 강물을 후회로 바라보았다/썩은 폐를 거쳐간 연애와 밥을 생각할 때 검은 강은 거품과 기억을 섞었다/누군가 창밖으로 찢어진 편지와 노래를 던졌다….

더 이상 정열과 열정이 있을 수 없고, 생에 대한 장밋빛 낙관도 사라진 서른 살. 시인은 아름다웠던 연애의 기억마저 ‘썩은 폐’ 혹은, ‘검은 강’이란 시어로 어둡게 그려낸다. 여기서 창밖으로 던져진 ‘편지와 노래’란 젊음의 영역을 뺏긴 시인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청춘의 은유가 아닐지.

‘이 시대의 사랑’ ‘내 무덤 푸르고’ 등의 시집을 통해 절망과 회의의 시학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최승자는 송재학보다 암울 쪽으로 한걸음 더 나간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위의 책 중 ‘삼십 세’.

‘설운 서른’에 담긴 시 대부분은 잿빛으로 음울하고, 동굴처럼 어둡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시인은 추락하는 것들의 서러움만을 노래하진 않는다. 절망과 회의 속에서도 전망을 찾아가는 사람이 또한 시인이지 않겠나.

‘사람의 등불’로 독자들에게 친숙한 고재종 시인은 서른이란 서러운 나이 또한 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걸어야 할 피해갈 수 없는 ‘길’임을 새삼 알려준다. 그 노래가 독자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길이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어서/나는 다시 피에 젖은 흙빛의 길 위에 섰다/길은 항상 저만큼의 풍광 속에서 일렁거렸다….

-위의 책 중 ‘길의 길’.

 

모든 걸 견디게 하는 힘 사랑
송기원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송기원의 시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은 출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중학생 시절 송기원의 절망과 예민했던 문학청년 시절의 고뇌가 오롯이 담겼다.

송기원의 생애는 그야말로 기구했다. 지난 세기엔 민주화운동에 투신, 감옥을 4번이나 들락거렸고, 그 와중에 어머니가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다. 세상과 문학에 염증을 느끼고 인도로 떠나기도 했으며, 오랜 기간 절필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처럼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송기원이 긴 세월을 침묵으로 이겨내고 혼란과 혼돈으로 점철된 인간사를 한 발자국 뒤에서 그윽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바로 이 시집이다.

“그대여, 얼마나 오래 숨어살면서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아야/ 그대는 치자꽃 향기처럼 나에게 풍겨올는지요”라는 시구(詩句)는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친다.

시집은 ‘바람꽃’ ‘각시붓꽃’ ‘수선화’ ‘달맞이꽃’ ‘능소화’ ‘망초꽃’ 등 갖가지 꽃 이름으로 환하다. 그중 복사꽃은 이 책의 ‘절창 중 절창’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런 노래다.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한 폭의 수채화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시. 모질고 모진 첫사랑을 떠올리는 순간만은 이 혹한의 추위도 잠시 물러가려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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