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늦게 시작한 겨울이 조금씩 겨울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겨울이 겨울답지 아니하여 온화하면 이듬해 농사와 어로(漁撈)에 애로가 생기기 마련이다. 차고 넘치는 벌레들의 향연과 은성(殷盛)한 축제도 그렇고 해양 생태계 역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5세 청년 공자의 명언 ‘군군 신신 부부 자자’가 떠오른다. 제(齊) 경공(景公)이 정사(政事)에 관해 물었을 때 당대 최고 천재 중니(仲尼)의 답변이 그것이었다.

일기 예보에 관한 일간지들의 협박성 보도를 보자. “일요일 ‘최강한파’ 닥친다…아침 체감기온 영하 21도.” 12월 18일 서울 아침 최저기온과 체감온도는 각각 영하 14도와 영하 21도로 예보된다. 여기서 기자의 주안점은 ‘최강한파’다. 최강(最强)이란 말은 더는 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자의 머릿속에 자리한 최강의 한파가 영하 14도에 체감온도 21도라는 얘기다. 정말 그것이 지구와 대한민국의 최강한파인가?!

1805년 출간된 현동 정동유의 ‘주영편’에 따르면, 그때까지 조선에는 쇠바늘이 없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글이 유씨(兪氏) 부인의 ‘조침문’이다. 청나라 사신으로 간 시삼촌에게 바늘을 얻어 27년을 쓰다가 바늘이 부러지는 바람에 애통한 심사를 수필로 풀어낸 것이 ‘조침문’이다. 사대부 집안 처자(妻子)야 청국의 쇠바늘을 얻어쓸 수 있었으나, 민초(民草) 아낙들은 대바늘로 옷과 이불을 꿰맸을 터 겨울의 우심(尤甚)한 추위를 어찌 견뎠을까?!

4∼50년 전 서울 최저기온 14∼5도는 연례행사였다. 그 정도 추위는 당연했고, 석유-가스보일러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다. 문풍지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이닥쳤고, 윗목에서는 아버지의 자리끼가 쩍쩍 얼어붙었다. 연탄 한두 장으로 하룻밤 나는 게 예사였고, 식전 댓바람에 세수할라치면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때 기자들은 ‘최강한파’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첨단의 창호와 난방으로 한겨울 실내온도 25∼6도에 딸기와 열대과일이 넘쳐나는 시절에 ‘최강한파’ 운운하니 기가 막힌다. 기후 온난화로 밋밋하고 맹숭맹숭한 겨울을 보내는 판국에 조금 내려간 기온을 두고 ‘최강한파’라고 호들갑 떤다. 여기에 맞장구치듯 날씨를 보도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감기 조심해라, 건강 유의해라, 하면서 어린애 다루듯 시청자를 희롱한다.

3주 연속 베를린의 최저기온이 영하 30도, 최고기온이 영하 18도였을 때 최강이라 과장한 도이칠란트 언론사를 본 적 없고, 최저기온 영하 20도인 흑룡강(黑龍江) 추위를 중국 기자들이 ‘최강한파’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없다. 평상시 영하 40도 최저기온이 영하 28도로 올라가자 ‘따뜻한 겨울’이라 서운해하는 러시아인들의 표정은 환하고 밝았다. 고작 영하 14도 가지고 숱한 언론사 기자들이 합창하는 ‘최강한파’ 놀음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수사의 과잉은 언어의 과잉을 낳고, 언어의 과잉은 행동의 과잉을 낳는다. 필요 이상의 꾸밈과 언어와 행동은 사회 구성원들의 불화와 충돌을 초래한다. 적절한 기준선을 지키는 언어와 행동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규준(規準)으로 자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