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이 부쩍 차가워진 12월 중순. 매운 날씨 탓에 야외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기다. 너나없이 따뜻한 거실이나 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럴 땐 영화 한 편 감상하는 것도 잠시잠깐 추위를 잊을 수 있는 유용한 여가 보내기 방편이 아닐까.

세상엔 감독과 배우의 숫자만큼 다양하고 많은 영화가 있다. 그중 어떤 걸 선택해 볼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렸다.

혼자 있을 때면 생각이 많아지고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해보는 계절인 겨울. 내친김에 인간과 세상이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고, 변화해나갈 것인지 한 번쯤 떠올려보고 싶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화 2편을 소개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향수’.

운명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살인자 ‘향수’

20세기 초반의 유럽 진보 소장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무정부주의와 변형된 마르크시즘이 횡행하던 때다.

“모든 극단은 불온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아름답다.”

이 명제가 비단 사회학과 정치학에서만 적용된 건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질서와 시스템에 대한 변혁이 숨 가쁘게 진행된 것처럼,

사물을 유사하게 모사만 해오던 화풍이 변했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실존주의가 문학 서술의 새로운 사조로 떠올랐으며, 이른바 ‘전위예술’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극단 추구가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됐다는 건 어쩌면 우리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문학애호가라면 기억할 것이다. 지난 시절 한국에 불어 닥친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풍’의 진원지가 된 소설 ‘향수’가 톰 튀크베어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이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된 때는 18세기 프랑스. 좀 더 구체적으론 파리와 그라스란 도시다. 원작자와 감독은 문장과 영상을 통해 말한다. “극단의 추구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다.”
 

영화 ‘향수’는 극단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영화 ‘향수’는 극단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누구도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향기까지 맡을 수 있는 한 사내가 파리 빈민가에서 태어난다.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 이 극단의 향기중독자는 극단적으로 매혹적인 향수를 만들어내는 게 꿈이다.

그러나, 극단의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은 극단의 수단 없이는 불가능한 법.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몰고 다니는 이 불온하고 위험한 사내는 아름다움을 위해 살인이란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다. 아니,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운명이 그를 ‘그 방식(살인)’으로 몰고 갔다고 봐야 옳겠다.

대체 그 향수는 무엇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쥐스킨트의 명성을 제외하고도 빼어난 이 영화는 시종일관 우울하고 어두운 톤으로 진행되며, 침울한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묻는다.

“만약 당신이 그루누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길과 피해가야 마땅한 현실의 길 사이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헤매는 주인공과 관객들이 동시에 어른거린다.

관객들이 ‘향수’에 열광한다면 그것은 쥐스킨트의 명성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영화 자체로도 완성도가 빼어나다.

당대 유럽 풍경의 사실적인 묘사는 물론, 속도감 있고 스릴 넘치는 편집과 연출기법이 튀크베어 감독의 만만찮은 공력을 짐작케 한다.

고대 이집트의 전설에 매혹된 극단적 감각의 사내는 과연 불온과 위험을 넘어 극단의 아름다움과 조우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을까? 또한, 그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읽는 행위가 전제돼야 상상력을 펼쳐 감동에 이를 수 있는 문자예술(소설)과 달리 가만히 앉아 보는 것만으로도 일정 정도의 깨달음과 즐거움을 주는 영상예술.

영화 ‘향수’는 읽는 재미와는 또 다른 보는 재미를 준다. 어떤 거냐고?

한물간 향수 제조자 주세페 발디니 역할로 잠시잠깐 등장하지만, 그 존재감이 누구보다 강렬한 명배우 더스틴 호프만과의 만남, 영화 말미 광장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춤과 같은 난교, 마지막 장면의 충격적 재현이 그렇다.

 

거장의 세계 해석이 담긴 영화 ‘홀리 마운틴’.
거장의 세계 해석이 담긴 영화 ‘홀리 마운틴’.

실험과 독창성이 빚어낸 걸작 ‘홀리 마운틴’

보통의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천재”라는 이야기를 듣는 예술가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독창성의 획득, 흉내 낼 수 없는 창조력, 거기에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慧眼) 등이 바로 그것.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남아메리카 칠레 출신의 러시아계 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재론의 여지없이 천재다. 그것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은.

대학에선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자유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파리로 훌쩍 날아가 마임(Mime·대사를 사용하지 않고 표정과 몸짓으로 전달되는 연극)을 수련한 그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전 유럽을 휩쓸었던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받은 마지막 세대다.

또한,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자신이 선택한 문예이론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바꾸고자 했던 혁명가였다.

실험과 도전, 생경함과 낯설게 하기, 더불어 앞서 언급한 독창성과 창조력에 미래 예측력까지 두루 갖춘 조도로프스키의 영화.

그가 자그마치 47년 전에 만든 ‘홀리 마운틴’. 영화는 그 당시부터 극장을 찾은 사람들의 경악과 고개 갸우뚱거림, 한숨을 불렀다.

조도로프스키가 한국 관객들에게 전혀 생소한 감독은 아니다. 1989년에 연출한 ‘성스러운 피’는 국내에서도 개봉돼 흥행에선 실패했지만, 소수의 뜨거운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성스러운 피’는 조도로프스키가 만든 가장 쉽고 대중적인 작품. 그럼에도 상영 도중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객석에서 일어선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홀리 마운틴’에는 ‘성스러운 피’보다 훨씬 더 많은 상징과 복선이 숨겨져 있다. 마치 매우 복잡한 추리소설 수십 권을 한꺼번에 읽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해석이 난감한 어려운 영화라는 이야기.

영화를 시간 때우기 방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홀리 마운틴’을 만난다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 불행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선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영화 한 편을 두고 의미 부여가 과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천만에.

해괴한 영화 문법과 비교 대상이 없는 이질적인 촬영기법, 거기에 천재의 광기까지 참을성 있게 견뎌낼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홀리 마운틴’ 관람은 고문에 가까울 것이기에.

장황한 사전 설명과 달리 영화의 줄거리는 간략하고 간명하다.

남아메리카의 한 나라로 짐작될 뿐, 어딘지 명확히 알 수 없는 땅에 떨어진 신(神)을 닮은 사내. 자기표현에 서툰 이 사내는 여러 협잡꾼들에게 휘둘리다 불구의 난쟁이와 함께 정체 모호한 지도자를 따라 불멸의 산을 찾아 나선다.

그들 곁에는 권력과 돈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또 다른 일행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갖가지 사건들….

2시간이면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 속에 감독이 담을 수 있는 메시지는 얼마나 될까?

‘홀리 마운틴’ 안에는 자본주의 비판,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유럽의 남미 침략에 대한 은유, 권력의 본질에 대한 연구, 구획되지 않는 자아와 타자 사이, 인간의 유한성과 세계의 영원성 탐구 등이 모조리 담겨있다.

그것도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된 상태다. 이 영화가 1975년에 만들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영화 ‘홀리 마운틴’ 포스터.
영화 ‘홀리 마운틴’ 포스터.

하나하나가 초현실주의 회화 같은 수백 개의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뿜어내는 빛이 눈부시다.

그 빛을 조율하는 조도로프스키의 감각은 “놀랍다”는 말만으론 표현이 불가능하다.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빼어난 예술품 앞에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충격)을 불러온다는 평론가도 있었으니.

아흔을 넘겼음에도 나이와 무관하게 창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치지 않은 이 늙지 않는 천재는 알프레드 히치콕과 조지 로메로를 흠모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이라면 누구나 톨스토이를 읽는다. 그러나, 톨스토이를 읽는 청년 모두가 톨스토이처럼 쓸 수는 없는 법. 허나, 조도로프스키는 그걸 해냈다. 히치콕과 로메로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 단정이 비단 기자만의 판단이 아니라는 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증언해줄 터.

‘홀리 마운틴’을 만난다는 건 셀 수 없이 많은 명화가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복도를 설레는 마음으로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가슴 떨림’에 동참해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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