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 기다리는 ‘고령 지산동고분군’

세계유산 최종 등재 결정 여부를 앞두고 있는 지산동고분군 /고령군 제공

가야고분군 중 하나인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는 언제 확정될까? 비단 고령군민만이 아니라 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세계유산(世界遺産·UNESCO World Heritage)이란 유네스코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지정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말한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유산들을 지속적으로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해왔다.

가야고분군은 문화유산에 해당하며, 만약 등재된다면 한국의 16번째 세계유산이 된다. 지산동고분군은 연속유산(지리적으로 연접하지 않는 각 하위 요소로 구성된 유산)인 가야고분군 중 하나에 해당된다.

가야고분군은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해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등 7개의 고분군을 포함한다.

대가야의 역사가 숨 쉬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에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바 있다.

지난 2018년에는 합천 옥전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등 4개의 고분군이 추가돼 가야고분군 유산 범위가 확대 결정됐고, 2019년 7개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것.

지산동고분군은 올해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최종 등재여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국제 정세의 악화로 지금은 등재 여부를 논의할 세계유산위원회가 잠정적으로 연기된 상태다.

현재 외교부와 문화재청은 국제 정세 변화를 파악하며, 지산동고분군의 세계유산등재 여부와 시기를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야고분군 7개 고분군 중 하나
5~6세기 가야권 최대 규모 축조
562년 신라 진흥왕에 멸망된 후
잊혀져오다 일제강점기 첫 발굴
8차례 조사에도 기본 자료 없어
1963년 사적 79호로 지정 이후
44·45호분 필두로 발굴 본격화
단독 석곽묘 등 독특한 양식 눈길
32호선 가야 최초 금동관도 출토
유산 목록 최종 등재 현실 된다면
정치·경제·문화 복원 큰 역할 기대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대가야왕릉전시관  /고령군 제공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대가야왕릉전시관 /고령군 제공

□ 신라에 의해 대가야의 역사는 지워졌지만

그렇다면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어떤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가진 것일까? 지산동고분군은 5~6세기에 걸쳐 축조된 대가야 지배층의 집단묘역이다.

대가야는 기원후 42년 시조 이진아시왕이 건국해 562년 멸망 때까지 지속된 고대국가다. 대가야의 중심은 지금의 고령군이었고, 고령군은 대가야 멸망 후 대가야군(大伽倻郡)을 두었다가 신라 경덕왕 시기(757)에 고령군(高靈郡)으로 개칭됐다.

‘삼국사기’ 등 각종 역사서를 볼 때 당시 대가야는 ‘가라(加羅)’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고, 대가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대가야는 전기 가야사회를 주도했던 금관가야가 쇠퇴한 이후 5세기부터 급속하게 성장해 후기 가야사회를 주도했다. 6세기에는 그 영역이 합천, 거창, 산청, 함양, 남원, 장수, 여수, 순천까지 뻗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의 전성기였던 5~6세기에 가야권역 최대 규모로 축조됐다.

대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했는데, 신라는 대가야를 멸한 후 대가야군을 설치하고 지배세력을 해체시키는 등 대가야를 역사 속에서 지우려 했다.

이로 인해 지산동고분군에는 대가야 멸망 이후 더 이상 가야고분이 축조되지 않았으며, 대가야를 점령한 신라의 고분만이 만들어졌다. 멸망 후 대가야의 고분문화는 의외의 지역인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고분군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는 대가야 지배세력을 와해시킨 신라의 사민정책(정치적 목적에 의해 백성들을 강제이주 시키는 정책)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추정.

이처럼 대가야는 주체적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나라의 역사가 철저히 지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현재는 각종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대가야의 역사가 복원되는 중이다.
 

지산동고분군 73호분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고령군 제공
지산동고분군 73호분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고령군 제공

□ 발굴·조사, 지속적으로 진행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귀한 유적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초기에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고적조에 등장한다. 거기선 “현의 서쪽 2리 남짓 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금림왕릉이라고 일컫는다”고 쓰고 있다. 그러니, 그 시기부터 지산동고분군을 왕릉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최초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 동경제국대학 세키노 타다시 교수가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진행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시행된 조사는 모두 8차례다.

하지만, 그때 진행된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한 가야유적의 발굴과 조사는 식민사관인 임나일본부설(일본이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일본부를 설치해 통치했다는 주장)의 증명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 짙었다. 또한, 발굴·조사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다.

유일하게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이 금림왕릉, 즉 현 5호분(구 39호분)인데 이는 지산동고분군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장 큰 고분이다. 이마저도 조사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당시 사진과 출토 유물 일부만이 전해질 뿐이다.

지산동고분군이 사적 79호로 지정된 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1962년의 이듬해인 1963년 1월 21일이다. 1970년대 후반엔 문화재관리국의 ‘가야문화권 유적 보존을 위한 정화사업’의 한 방편으로 지산동 44·45호분이 경북대학교 박물관과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됐다. 이 중 44호분은 직경 27m의 대형 고분으로 내부에서 주곽 1기·부곽 2기·순장곽 32기가 확인됐다. 이 고분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순장된 무덤이다.

44·45호분의 발굴과 조사는 가야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즈음부터 방치됐던 가야사 연구가 다시 적극적으로 진행된다. 1978년에는 32~35호분이 발굴·조사됐고, 이를 통해 대가야식 묘제의 정형이 재차 확인됐다, 32호분에선 가야 최초의 금동관이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다음에는 30호분과 73~75호분 등 5세기 전반기, 그러니까 지산동고분군 조영 초기에 축조된 고분이 조사됐고, 최근엔 그간 비밀스럽게 존재했던 고분군의 남쪽 구릉에 위치한 518호분과 604호분이 조사되기도 했다. 남쪽 구릉의 고분 또한 북쪽 구릉 것과 마찬가지로 대가야 양식의 묘제와 부장품이 확인됐다.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발굴과 조사는 앞으로는 꾸준히 이어져 5세기 중후기에 축조된 고분의 형태를 보다 정확하게 확인하고, 더 나아가 대가야 매장문화의 비밀을 밝혀낼 것으로 전망된다.

 

대가야 왕릉의 유물들.  /고령군 제공
대가야 왕릉의 유물들. /고령군 제공

□ 세계유산 등재로 가야의 비밀 밝혀지길

지산동고분군은 고령시를 병풍처럼 감싼 해발 310m의 주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을 따라 조영돼 있다. 능선의 정상부엔 대형분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중·소형분이 분포된 것이 특징.

현재까지 확인된 봉토분은 706기다. 봉토가 남아있지 않은 소형 무덤을 포함하면 그 수가 수천에 이른다고 한다.

북쪽과 남쪽에 만들어진 고분은 크게 볼 때 ‘대가야 고분문화’라는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다만 북쪽 구역의 구릉은 주산의 주능선에 해당하며, 이곳에 축조된 고분은 남쪽 구역의 고분에 비해 입지와 규모면에서 우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보다 좋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 대가야사회에서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고, 사회적 지배관계를 확립하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으로 보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그러니, 북쪽 구릉에 자리한 대형분에 묻힌 이들은 대가야의 최고 지배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산동고분군을 포함한 대가야고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순장곽. 한반도 고대사회에서 순장(신분이 높은 이가 죽었을 때 강제 혹은, 스스로 죽어 함께 묻히는 장례풍습)은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이런 경우 대개 매장주체부 또는, 부장공간에 순장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산동고분군의 경우엔 순장자를 위한 단독석곽을 묘역 안에 마련하고 있다. 이는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고분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야고분군은 모두 1천여 기. 수많은 가야고분군은 묘제양식과 토기양식의 분포를 통해 7개의 문화권으로 분류됐다. 고분군의 규모와 유물 등을 통해 각 문화권의 중심고분군이 확인된 것이다. 그 중심고분군이 세계유산 등재를 기다리는 7개 가야고분군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한 축이었던 가야는 500년 이상 한반도 남부에 실제로 존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체적 역사서가 없어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포함한 가야고분군의 세계 유산 등재는 가야 역사를 비롯한 정치·경제·문화의 복원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기에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가야고분군이 언제 정식 등재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이들이 많다.

고령/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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