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초등학교서 임곡항 왕복 4.2㎞

4 도구해수욕장의 가을 풍경.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4 도구해수욕장의 가을 풍경.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11월의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잘 닦인 유리잔처럼 투명했다. 푸른 보석처럼 빛까지 났다. 선물 같은 날씨 속에서 ‘산책의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은 유쾌했다.

포항 시내에서 209번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도구해수욕장이 지척인 동해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기자를 내려놓은 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떠났다.

행정복지센터 바로 옆엔 동해초등학교가 자리해 있었다. 야트막한 담장 뒤로 키 큰 소나무들이 근사하게 늘어섰다. 파스텔로 색칠한 그림처럼 예쁜 학교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동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니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초등학교.

‘바다가 지척인 곳에서 꿈꾸며 자라는 이 학교 아이들은 아마도 마음까지 바다처럼 넓고 넉넉하겠지’란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

연이어 기억 회로에 새겨진 정일근의 시 한 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유리창 청소’라는 부제가 붙은 ‘바다가 보이는 교실’. 이런 노래다.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시 속에 등장하는 ‘열이’는 어떤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서 공부했던 아이일까. 동해? 서해? 남해?

그런 건 궁금해 하지말자. 그곳이 어디면 어떠랴. 바다처럼 맑고 착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야 한국 어디를 가도 흔하지 않겠는가.

분명 동해초등학교에도 ‘열이’처럼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아이들이 지천일 것이다. 그것이 사소하게 보이는 ‘유리창 닦기’라 할지라도. 세상은 그런 마음들이 모여 ‘깨끗한 유리창’처럼 조금씩 아름다워지는 법.

 

연오랑세오녀 전설 품은 도구해수욕장
길이 800m 백사장서 소나무 숲 지나
임곡항 좌표 찍고 돌아오는 30∼40분
조용히 사색하며 걷는 산책길로 그만
방파제 벽에 그려진 익살스런 그림들
낯선이에게도 사람 좋은 웃음 던지는
어촌 노인들까지 따스한 정취' 가득

1 조용하고 평화로운 임곡항 풍광.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1 조용하고 평화로운 임곡항 풍광.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한적한 가을 속을 걸어 도구해수욕장으로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걸어보고 싶어 선택한 이번 산책길은 동해초등학교를 출발해 도구해수욕장을 거쳐 임곡항까지 가는 30~40분짜리 코스. 같은 길을 되짚어 오면 약 10리쯤의 거리니 큰 힘 들이지 않고 유유자적 돌아보기에 적당해 보였다. 예상은 틀리지 않아 실제로도 그랬다.

동해초등학교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니 바로 아래 해수욕장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그야말로 손짓해 부르면 들릴 지호지간(指呼之間)이 바다다.

포항이 품은 주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도구해수욕장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거대한 바위에 올라 먼 바다로 떠났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800m에 이르는 백사장은 폭이 50여m. 큰 해변이지만 여름이 지난 바닷가엔 인적이 드물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동네 주민 하나, 운동복 차림으로 해변을 뛰는 젊은이 한 명이 전부였다.

도구해수욕장은 많게는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지 않은 규모다. 게다가 시내에서 멀지 않아 햇살 좋은 주말이면 나들이 하는 식구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가을. 거기다 평일 오후니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다. 조용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겐 이즈음이 좋은 산책 시기.

도구해수욕장은 1970~80년대 한국 사실주의문학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긴 소설가 황석영의 작품 ‘몰개월의 새’의 무대가 된 공간이기도 하다.

베트남으로 떠날 군인들을 훈련시키던 곳.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배태(胚胎)된 도구 해변을 지나며 전쟁이 인간에게 준 아픔을 떠올렸고, 그 회상 위로 갈매기 두어 마리가 무심히 날아다녔다.
 

바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눕힌 도구해수욕장의 소나무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바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눕힌 도구해수욕장의 소나무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육지로 머리 눕힌 소나무 사이를 지나면 임곡항

도구해수욕장에서 임곡항으로 가는 방법은 2가지다. 반듯하게 만들어진 아스팔트 길로 가도 무방하지만, 가능하면 바닷가에 접한 소나무 숲 사이로 걸어보는 걸 권한다.

300~400m가량 이어지는 숲길은 소나무 냄새가 향기롭고, 나무 사이로 부는 가을바람의 정취를 느끼기에 그만이다. 숲 중간엔 벤치도 몇 개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길 수도 있다.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곳 소나무들이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육지를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이리라. 수십 년 이상 그 바람을 맞았으니 머리가 바다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건 당연지사.

인간의 생은 길어야 100년이다. 그처럼 삶이 유한한 인간과는 달리 바다와 바람은 수천, 수만 년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해왔다.

그 유구함을 새삼 곱씹으며 소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를 걸었다. 쉽게 잊기 힘든 산책이 분명했다.

걷기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건 이미 다수가 알고 있다. 그러나,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산책은 외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실수를 미연에 막기 위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알려 주는 정보 하나를 공유한다. 이런 것이다.

“걷기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의 경우 운동 강도가 30~40% 정도인 완보나 산보로 걷기를 하다가 점차 운동 강도를 높여 40~70% 정도인 속보, 급보로 걷는 것이 효과적이다. 운동시간은 자신의 목표 심박수에 도달한 상태에서 30~60분 정도 지속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초보자는 주당 3회 정도가 적당하며 체력이 향상되면 그 횟수를 늘려가도록 한다. 걷기 운동은 운동 강도가 낮기 때문에 속도를 빠르게 해도 목표 심박수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운동 시간을 늘려줌으로써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임곡항 주변에서 발견한 익살스런 벽화.
임곡항 주변에서 발견한 익살스런 벽화.

▲왠지 ‘어진 사람들’이 살 것 같은 임곡항

도구 해변 한쪽에서 시작되는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임곡항이 보인다. 그야말로 ‘20세기풍’의 낭만적인 포구다.

블록으로 쌓아올린 담 너머 옛집 마당엔 까치를 위해 남겨둔 빠알간 감 몇 개가 그림처럼 선명했다.

방파제와 벽에 그려진 익살스런 그림들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유년 시절 외가에 온 기분을 들게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정취.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이정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이정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방파제 위에 서서 반대편을 바라보니, 멀리 포항제철과 포항 시내가 가물거린다. 자신의 동네에 살지 않는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먼저 웃어주는 어촌 노인들의 인심 역시 좋았다.

‘논어’ 이인(里仁)‘편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무슨 뜻이냐고?

“사람이 사는 곳은 어진 기운이 있어야 한다. 어진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걸 선택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쯤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무슨 까닭인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엔 이웃과 더불어 웃음과 울음을 기꺼이 나누는 어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길을 되짚어 동해초등학교로 돌아올 때 이런 혼잣말을 했다.

“조용하고 포근한 임곡항은 40년 전 떠나온 고향과 닮았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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