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착하고 쓸쓸한 도시를 지우는 비문,

언젠가 우리도 다 지워지고 말겠지만

고인 물은 냄새나고 부패하고 변한다.

눈부셨던 날도 흘려보내야

반짝이며 산다.

저기 멀리에 젖은 땅이 끝나는 근처,

하늘이 시작하는 희미한 경계에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순간이 보인다.

한나절의 비는 저녁 무렵에야 끝나고

그친 곳에서부터 명지바람이 일어난다.

바람을 타고 오는 숨결들이

오늘은 순한 저녁 햇살이 되었다.

주황색 도시가 눈부신 축제를 연다.

사방에 퍼지는 장엄한 일몰, 용서해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부분)

마종기 시인은 죽은 이들이 펼쳐놓은 듯한 일몰의 시공간을 ‘축제’로 표현한다. 그는 저 주황색 축제로 이미지화 되는 죽음을 강렬하게, 그리고 환하게 맞이하고자 한다. 노년의 그는 그렇게 축제 속으로 들어갈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때 그는 동생을 포함한 죽은 이들, 아니 그들이 묻힌 도시에게 용서를 빈다. 그것은 이승에서 그들이 살았던 도시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용서일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