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서 감상하는 ‘포스코 야경"
‘포항답게" 만드는 명백한 오브제
영일대해수욕장·이가리 닻 전망대
걸어서 즐기기엔 좋은 ‘낭만 바다"
위드 코로나가 이끌어낸 ‘차박 열풍"
포항 해변가도 곳곳이 성지로 등극

‘차박 여행자’로 포항을 즐기기 위해 바닷가로 온 사람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항온동물’로 지칭되는 모두가 견딜 수 없는 더위가 한국을 휩싸고 있다.

인간의 체온 이상을 넘나드는 온도가 지속되는 8월 초의 폭염. 선풍기와 에어컨을 동원해 몸이 느끼는 온도를 낮춰보고 싶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다.

이런 뜨거운 날들이 캄캄한 밤까지 이어지는 열대야. 많은 이들이 더위에 취약한 인간이 아닌, 차가운 심해를 헤엄치는 물고기로 존재를 전이하고 싶어지는 시절이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시간이 지속될까? 가끔은 섭씨 40도를 위협하는 집안 온도계가 도깨비처럼 두렵다.

아주 오래전 개봉한 영화지만 어둡고, 습하고, 그래서 인간의 몸을 움츠리게 하는 ‘그랑부르’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듯하다.

며칠 전이다. 견딜 수 없는 무더위를 피해 어둠이 내린 바닷가를 한참 동안 거닐었다. 점점이 빛나는 몇 점 불빛 외에는 어떤 것도 반겨주지 않는.

앞서 언급한 ‘그랑부르’를 다시 떠올린 건 그 순간이었다.

 

포항 청하면 ‘이가리 닻 전망대’의 밤 풍경.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포항 청하면 ‘이가리 닻 전망대’의 밤 풍경.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늘어선 ‘차박 여행자’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푸르게 일렁이는 파도와 하얀 거품을 물고 자지러지는 포말, 원색의 비키니가 달리는 해변과 첫사랑의 기억인양 붉게 멍드는 석양. 전형적인 여름날 바닷가 풍경이다. 동양과 서양이 다를 수 없고,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은.

아이들이 입을 모아 부르는 다장조의 동요 같은 도시의 회색 일상도 19세기나 지금 21세기나 다를 바 없다. 잠시잠깐의 떠남이 그 단조로움을 얼마만한 힘으로 치유할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

2022년 여름은 누구나 바다로 가는 기차를 타고 싶은 목마른 날들이다. 하지만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언제나 있기 마련.

햇살 부서지는 낭만의 금빛 해변을 꿈꾸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영화감독 뤽 베송의 영화 ‘그랑부르’는 조그맣지만 그 힘을 부정할 수 없는 대리만족의 기쁨을 선사한다. 이 영화는 차갑고 서늘한 페루와 그리스의 바다풍광을 배경으로 ‘인간이란 끊임없이 외로움과 싸우는 가여운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슬프고, 그 슬픔 때문에 끔찍하게 아름다운 영화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바다 건너 낯선 땅으로 가는 길이 막힌 지 이미 오래. 한 해에 1천만 명 이상이 가깝건, 멀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여행을 다녔던 한국인들은 ‘앞으로는 오로지 조그만 한국, 여기서만 생을 견뎌야 한다’는 갑갑함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타고 다니던 차에 텐트를 싣거나, 아예 기본적 의·식·주의 해결이 가능한 캠핑카를 마련한 이들은 이른바 ‘차박’으로 갑갑함을 풀고 있다.

대여섯 시간이면 ‘낭만의 금빛 해변’으로 자신을 데려다줄 비행기에 몸을 싣기 어려워진 시기.

그러니, “불법주차입니다. 빨리 차를 빼주세요”라는 위협을 감수하면서 캠핑카에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실은 여행객들을 마냥 질책하기도 어렵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 그보다 더 뜨거운 열망으로 차를 몰고 바닷가를 향하는 여행자들. 그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마음속에서 ‘차박 캠핑 여행자’를 꿈꾸고 있기 때문 아닐까?

 

어둡지만 아름다운 바다의 풍광의 담아낸 영화 ‘그랑부르’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어둡지만 아름다운 바다의 풍광의 담아낸 영화 ‘그랑부르’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 포항 밤바다가 주는 특별한 선물을 기다리며

앞서 말한 영화 ‘그랑부르’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자크 마이욜(장 마르크바 분)과 엔조 몰리나(장 르노 분)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다. 한적한 그리스의 해변 마을에서 누가 깊이 자맥질하는가를 내기하던 철부지들. 영화는 그 철부지들의 성장과 좌절, 희망과 소멸을 ‘짙푸른 바다’의 색채와 구원의 여인으로 상정된 조안나(로잔나 아퀘트 분)를 통해 보여준다.

1988년 프랑스 칸영화제 오프닝 작품으로 상영된 ‘그랑부르’는 아주 긴 세월을 뛰어넘어, 하늘만큼이나 파랗고 광대한 심해(深海)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이곳이 싫지만, 다른 저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인간들의 소심함을 위로해왔다.

혼자선 외로움을 견딜 힘이 없고, 외로움을 나눠 가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용기마저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였을까? “나의 우주는 바로 당신”이라는 로잔나의 고백은 새벽녘 해미 같은 서늘함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적셨다.

20세기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바다는 푸르렀다”고.

눈으로 보는 바다는 단지 아름다울 뿐이다. 폭염의 햇살을 가리는 파라솔 아래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 모래성을 허물며 발가락을 간질이는 파도, 수평선 저편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 그러나, 인간사에 어찌 아름다움만이 있을까.

눈이 아닌 가슴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막막함으로 우리의 가슴을 막아선다. 맑은 서정시의 소재가 되고 고운 노래의 가사가 되었던 바다. 그러나, 그 짙푸름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슬픔이 녹아있던가. 세상사의 회한(悔恨)이란 인간에게나 바다에게나 마찬가지인 것을.

포항의 해변에선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포스코가 만들어내는 밤의 불빛을 만날 수 있다. 때론 여름날 정글을 닮은 초록빛으로, 가끔은 성하(盛夏)의 열정보다 온도 높은 선명한 붉은색으로 환한.

낭만과 원시의 키워드인 ‘바다’가 생산과 노동의 은유인 ‘공장’의 불빛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실 그게 보편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깊은 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모래밭을 거닐어본 사람은 안다. ‘낭만’과 ‘노동’은 별개로 존재하는 상극(相剋)의 단어가 아닌, 인간의 삶 내부에 동등하고 동일하게 존재하는 상생(相生)의 단어라는 것을.

살풍경한 포항제철이 하늘을 배경으로 밤마다 그려내는 원색의 불빛은 어찌 보면 동해안 바닷가마을 포항을 ‘포항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명백한 오브제(Objet)일 수도 있지 않을까.

 

포스코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해변을 밝히고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포스코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해변을 밝히고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이가리 닻 전망대에서 만난 밤바다는…

다시 ‘그랑부르’로 돌아가 보자. 서늘한 밤바다로의 떠남을 꿈꾸었지만, 떠나지 못하고 식은땀 끈적이는 도시에 남은 사람들.

떠난 사람들에게 ‘바다’는 분명 눈과 육체를 즐겁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떠나지 못한 사람은 어떤가? ‘그랑부르’를 통해 가슴과 영혼에 쌓인 일상의 묵은 때를 씻어내는 즐거움은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남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지.

영화의 마지막. 자크는 돌고래의 노래 소리만이 적요함을 깨는 심해로 영원히 사라진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떠난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요절시인(夭折詩人) 박정만의 절명시 한 줄.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우리 모두는 이 지긋지긋한 여름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그곳이 심해건, 우주건. 그러나, 그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상을 견디는 건 세속인간들의 천형(天刑)이기에.

지난 주말이었다. 포항 청하면까지 차를 몰아 ‘이가리 닻 전망대’의 밤 풍경 속을 표표히 거닐던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서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경계가 희미해진다”고.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바라며 어디로 가고 있냐?”고.

울울창창 소나무가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고,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속에도 수차례 등장하는 아름다운 바다에서 왜 친구는 굳이 삶과 죽음의 덧없음과 생의 허무를 떠올렸을까?

그날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이제야 이런 위로를 ‘이가리 닻 전망대’ 위에서 번민과 고뇌 속을 헤맸던 그에게 해줄 수 있을 듯하다.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열망과 환멸 사이의 간극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저 네 눈앞에서 빛나던 밤바다의 별빛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뿐.”

/홍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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