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보며 600년경주 남산 마애불 일어설 날은?
① 열암곡에 쓰러진 마애불

지면과 불과 5cm 간격을 두고 수백 년째 쓰러져 있는 남산 열암곡 마애불.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지면과 불과 5cm 간격을 두고 수백 년째 쓰러져 있는 남산 열암곡 마애불.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경주국립공원 새갓골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남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관광객이나 여행자가 드문 평일 오전이었다.

까마득히 먼 옛날 8세기에 만들어져 수백 년 전에 쓰러졌고, 아직 넘어진 그 형상 그대로 엎드려 땅을 보고 있는 ‘열암곡 마애불’을 조용한 가운데 세밀하게 관찰하고 싶어서였다.

주차장에서 만난 경주국립공원 안내원은 “가볍게 산책하듯 올라가면 됩니다. 20~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걸요”라며 더위가 시작된 초여름 산에 오를 기자의 긴장감을 풀어줬다.

그러나, 매일 남산을 오르내린다는 안내원과 보통 사람의 산행 속도는 달랐다. 체감하는 힘겨움 역시 같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30분쯤을 헉헉대며 걸었다. 종아리는 뻐근했고 셔츠가 땀에 젖었다. 그때서야 마침내 거대한 바위 전면에 몸을 숨긴 마애불이 우뚝한 콧날을 드러냈다.

마애불(磨崖佛)은 ‘바위에 새겨진 부처’를 의미한다. 경주만이 아닌 한국, 더 나아가 인도와 중국에도 다양한 기법으로 새긴 마애불이 적지 않다.

지난 2000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자.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지방의 암벽에 우뚝 섰던 2개의 불상, 즉 마애불은 높이가 각각 52.5m와 34.5m였다. 세계에서 가장 컸던 이 마애불은 불교 유물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한 과격 이슬람 세력에 의해 폭파됐다.

탈레반이 주도한 이 행위는 인류의 공동자산이라 할 문화예술을 모독하고, 인간이 축적한 역사의 시간을 거스르는 행동이었기에 세계 각국의 비판을 받았다.

경주 남산의 마애불은 이 같은 인위적인 이유로 쓰러진 것은 아닌 듯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라 혹은, 조선시대에 발생한 지진이 남산 열암곡 마애불의 붕괴 이유라고 추정하고 있다.

 

2007년 5월 22일 다른 불상 조사 중 내남 노곡리 산서 ‘우연히’ 찾아
높이 4m60㎝·새겨진 바위 무게만 80t… 불상 코와 바닥 간격은 5㎝
쓰러진 이유로는 1430년 6.4 지진·신라시대 지진 영향 등 견해 다양

□ 마애불, 경주 남산에서 1천200년의 시간을 뛰어넘다

남산 마애불은 높이가 4m60cm, 부처가 새겨진 바위의 무게가 80t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불상이 온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보존됐더라면 4세기 중국에서 만들어진 둔황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받은 감동을 경주에서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유물 보호를 위해 쳐놓은 철망 가까이 다가가 마애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매끈한 코와 얼굴 형상이 어제 만든 것처럼 또렷했다. 도저히 1천200년 전에 새겨진 불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바위에 깃든 부처는 저 홀로 시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경외감이 느껴졌다.

경주 남산은 1971년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로 지정됐고, 1985년엔 사적 제311호가 됐다. 지난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경주 역사유적지구)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아름다움과 그 안에 간직한 수많은 유물을 인정한 결과다.

‘남산 마애불’ 또는, ‘열암곡 마애불상’으로 불리는 이 유물은 언제 어떤 경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이 의문에 관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펴낸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상 정비 보고서’는 이런 답변을 들려준다.

“2007년 5월 22일 경북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119번지, 열암곡 석불좌상((列岩谷 石佛坐像)에서 남동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열암곡 석불좌상과 그 주변 사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사역 안에는 광배와 대좌를 갖춘 열암곡 석불좌상의 구성 부재가 흩어져 있었으며, 석불좌상의 보수·정비를 위해 유실된 부재 여부와 사역 배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주변 다른 불상의 조사와 발굴 과정에서 그야말로 ‘우연히’ 찾게 된 남산 마애불은 발견 당시부터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왜 쓰러졌는지” “어째서 일으켜 세우지 못했는지” 등의 의문은 발견 후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온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 안전한 보존 위해 철 구조물과 CCTV 등 설치

바위에 불상을 새기는 건 흔하게 볼 수 있는 불교미술의 한 양식이다. 학자들은 2~3세기 고대 인도의 석굴사원 조영에서 마애불 양식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양식이 서역을 거쳐 중국과 한국으로 넘어왔다고 보는 게 일반적 견해.

인도의 경우 초기에는 바위로 생성된 굴의 벽에 부처의 일대기와 관련 설화를 표현하다가 차츰 불상을 새기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한국의 경우엔 7세기를 전후해 충청도 해안 지역에서 마애불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다.

경주 마애불은 신라가 통일 후 번성기를 누리던 8세기 즈음에 새겨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발견 당시와 달리 현재는 보존과 복원을 위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 쓰러진 마애불 바로 앞까지는 접근이 어렵다.

외부 요인 탓에 발생하는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기계 장치가 설치됐고,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철망과 CCTV도 갖춰졌다. 또한, 인근 바위의 추가적인 붕괴를 방지하고자 철 구조물까지 추가로 제작됐다.

첨단 장비와 육중한 철제 구조물로 현대적 보호 장치를 완비해놓았음에도 남산 마애불 주위에선 고대의 신비스런 향기가 수시로 풍겨온다.

불상의 코와 바닥의 간격은 겨우 5cm 안팎. 어떤 역사학자는 이 틈을 ‘기적의 5cm’라 명명하기도 했다. 남산 마애불은 쓰러지는 순간에도 수백 년 후 자신을 발견할 사람들을 배려한 것일까?

□ 발견 초기부터 붕괴 이유 파악과 복원 논의 진행돼

지면에 거의 닿을 듯 엎드린 형태라 남산 마애불의 전체 형상을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발견 초기부터 마애불의 보존과 복원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아래 설명을 통해 전체 모습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열암곡 마애불상은 소발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조각돼 있다. 귀는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볼륨감 있는 삼도가 표현됐다. 불상의 수인은 왼손 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을 향하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남산 마애불이 쓰러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지난 2018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1430년에 발생한 규모 6.4의 지진으로 넘어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는 신라시대에 발생한 지진이 마애불을 넘어뜨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확한 붕괴 이유 파악과 함께, 보존과 복원을 위한 노력도 15년간 꾸준히 이뤄졌다.

“미적경관 정비, 탐방객을 위한 출입로, 마애불상 주변 배수로 작업 등 마애불상의 안전과 관람을 고려한 일련의 작업들이 하나씩 추진되었고, 마애불상 아래 석축 축조와 수목 식재 등을 통한 주변 지반의 붕괴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는 조치가 이어졌다”는 것이 이와 관련한 경주문화재연구소의 부연이다.

그렇다면 남산 마애불이 발견된 2007년부터 2022년 현재까지 붕괴 원인 조사, 보존·복원 방안 연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돼 왔을까? 다음 회에선 그것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쓰러진 남산 마애불 지척에 자리한 열암곡 석불좌상. /사진 이용선기자
쓰러진 남산 마애불 지척에 자리한 열암곡 석불좌상. /사진 이용선기자

기왕 경주 남산까지 갔다면…

바로 옆 쪽 ‘열암곡 석불좌상’
‘봉화곡 봉수대’ ‘염불사지’ 등
발걸음마다 역사·예술 ‘만끽’

쓰러진 마애불을 보러 경주 남산까지 갔다면 주위에 흩어져 있는 귀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함께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경주국립공원 새갓골주차장을 출발해 남산 마애불상이 위치한 곳까지 오르면 바로 옆엔 ‘열암곡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다. 파손된 채 흩어진 조각을 모아 복원한 불상으로 연꽃무늬 대좌와 화려한 광배가 눈길을 끈다.

산행을 좋아하는 관광객이라면 거기서 더 올라가 ‘봉화곡 봉수대’와 8세기 신라 불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국보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만나도 좋을 듯하다.

조금 더 힘을 내서 등산을 지속한다면 ‘기이한 승려의 염불 소리가 먼 산에서 서라벌 성안까지 들렸다’는 설화가 전하는 ‘염불사지’에도 이를 수 있다.

역사와 불교문화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시간을 내 한 번쯤 찾아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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