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山南義陣) 기억하고 추모하자 <3>

잡초가 무성한 포항 죽장면 상옥리 산남의진 무명용사 3인의 의총.

의병들은 홍해 전투 이틀 후에 다시 청하군 읍내를 공격해 순검 김학윤의 의복 및 관급품을 빼앗고 연이어 흥해 분파소를 공격해 적 2명을 죽이고 무기를 압수하였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 3동을 소각했다.

12월 5일에는 영덕군 주방(周防)에서 일본군 영덕분견대를 야간에 습격해 격파하였으나, 12월 6일 새벽에 일군경의 기습으로 의병 제2초장 남경숙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날 의병들은 마산(馬山·이전평 동방 약 4리)으로 퇴각했다. 이튿날 남경숙의 전사에 격분한 정환직이 부하 83명을 데리고 영덕을 역습했다. 이때 무기 28정을 빼앗고, 쟁암동(靜岩洞)에서 적 2명, 유암동(酉岩洞)에서 적 1명, 도천동(道川洞)에서 적 4명을 죽인 후 영덕읍의 분파소 및 관계 건물을 소각시켰다.

이에 일본군은 바닷길을 이용해 도망했다. 영덕에서 일본군이 패하여 도망가자 정환직은 본진을 이끌고 청하로 회군했다.

이 무렵 일본군은 계속 지원을 받아 그 기세가 강성했던 반면, 의진은 탄약과 장비가 고갈된 상태. 정환직 부대의 관동으로의 북상계획은 현실적으로 좌절되었고 눈앞에 있는 적과 투쟁하기에도 힘겨웠다.

1907년 12월 8일 청하군 각전(角田·뿔밭)에 모인 의병들에게 정환직은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 “내가 먼저 관동에 들어가 여러분들을 기다릴 것이니 여러분들은 각지로 나아가 탄약과 의복 등을 구해 관동으로 들어오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의병들은 별도로 계획을 세우고 상인 혹은, 농부로 변장해 각지에서 탄약을 구한 뒤 관동지방에서 다시 회합하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소부대별로 헤어졌다.

 

제2대 대장 정환직 상옥서 체포 피살
대장 없는 과정서도 의병 투쟁 계속
제3대 대장 흥해 사람 최세윤 추대
무기·인원·보급 등 열악한 환경서도
경상북도 전역서 1910년까지 활동
후기 의병전쟁은 일방적 학살 전쟁
일본 군경 1인당 의병 117명 숨져
최세윤, 1911년 붙잡혀 수감 중 순국

△정환직, 죽장 상옥에서 체포돼 영천에서 피살

청하군 뿔밭에서 소부대로 나눈 의병들은 각자 무리를 이루어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북상을 시도했다. 정환직은 대부분 부하를 해산시킨 후 6명만 데리고 청하군 북면 고천동(高川洞·현재 죽장면 상옥리)에 사는 동서 구칠서의 집으로 갔다.

나머지 분산된 의병들은 뿔밭에서 고개를 넘어 상옥을 거쳐 영덕 옥계계곡을 지나 개별적으로 북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07년 12월 10일 옥계계곡 끝머리에 있던 영덕군 대서면 옥녀암동 민가에서 북상하던 정환직의 부하 이봉수와 박기원이 미리 정보를 알고 포위망을 좁혀오던 일본군 보병 14연대 11중대에 포로로 잡혔다.

니시오카 중대장이 이끄는 11중대는 이들을 고문해 정환직의 움직임과 각 부대가 사방에 흩어져 은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환직의 은신처를 알아낸 니시오카는 이날 오후 1시경 부대를 출동시켜 1907년 12월 11일 오전 5시 30분 상옥리 계곡에 산재해 있는 90여 호에 달하는 민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정환직은 전날 상옥1리에 있는 구칠서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정환직은 같이 데리고 온 의병 6명을 턱골바위 고개에 배치해 적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1907년 12월 11일 아침 8시 30분경 정환직은 급히 구칠서의 집을 빠져나와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턱골바위 매복지로 갔다. 이때는 이미 일본수비대가 상옥 2리 쪽에서 그곳을 향하여 내려오는 중이었다.

이를 본 의병 보초 중 몇 명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않고 현장에 남아있던 3명의 의병은 정환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끝까지 응사하였으나 일부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일부는 체포됐다.

정환직 역시 이날 오전 8시 40분경 일본군들에게 체포되었다. 정환직은 청하군에 있던 수비대에 인치되었다가 1907년 12월 17일 대구로 호송되던 중 영천 남교(南郊)에서 총살됐다. 산남의진의 총수이자 제2대 의병 대장이었던 정환직이 일본군에게 재판도 없이 총살당함으로써 산남의진은 또다시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07년 12월 11일, 정환직이 체포되던 날, 일본군 수비대는 사지를 갈가리 찢어 누구 시체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한 의병의 시신 3구를 죽장면 상옥리 현장에 둔 채 정환직만 데리고 떠나버렸다.

이 시신들은 3일간 현장에 방치되다가 왜군들이 완전히 철수한 것을 확인한 마을 주민들이 대충 사지와 목을 맞추어 관도 없이 그곳에 묻었다. 이들이 끝까지 목숨을 걸고 정환직을 보호하기 위해 항전한 것으로 보아 산남의진 본부에 속한 심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환직 대장이 산남의진 본부로 사용했던 북동대산.
정환직 대장이 산남의진 본부로 사용했던 북동대산.

△흥해 사람 최세윤 3대 대장, 옥중에서 순국

정환직이 일본 군사들에게 총살을 당함으로써 대장이 없는 과정에서도 산남의진 의병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1908년 1월 8일 의병 약 30명이 영천 북안면에서 일본인 오우라 다쓰조(大浦辰藏)를 살해하였다. 1월 12일 손수조 등 의병 200여 명이 이석이의 지휘로 청하주재소를 공격하였으나, 의병 19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보았다.

의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튿날 의병 수십 명이 흥해 순사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인 순사 1명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총살했고, 1월 25일 의병 약 50명이 의성분파소의 적수비대를 습격했으나 소득 없이 퇴각하였다.

같은 날 이진규 등 의병 수십 명이 청하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으나, 이진규가 체포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산남의진은 흥해사람 최세윤을 추대해 3대 대장으로 삼았다.

최세윤 부대는 무기와 인원, 보급 등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경상북도 전역에서 1910년 6월경까지 활동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무수한 희생자만 나왔다.

이런 피해는 산남의진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 19일까지의 의병 희생자가 총 1만3천445명에 달했다. 이에 비하여 일본 측은 수비대 56명, 경찰 55명, 헌병 4명으로 모두 115명이 사살되었다.

단순계산으로 일본 군경 1명당 의병은 117명이 숨졌다. 이를 보면, 1905년부터 1910년 말까지의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활동인 후기의병 전쟁은 의병과 일본 군경 간의 전투라기보다는 일본 군경에 의한 일방적인 의병 학살 전쟁이라 해야 맞는 말이다. 결국, 최세윤은 1911년 초가을, 장기군 용동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순국했다.

△포항에도 최세윤 추모하는 비석 하나는 세워야

3대 대장까지 없어진 산남의진은 각기 흩어져 항전을 계속하다가 대개는 순절, 투옥 또는, 국외로 망명했다. 산남의진 선봉장으로 끝까지 살아남았던 우재룡은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주역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36년의 설움을 극복하고 나라를 되찾았을 때, 그 광복의 중심에 섰던 대한광복회에서는 그 이듬해인 1946년 2월에 산남의진 창의대장 정용기와 참모장 손영각 등 많은 장졸이 전사한 포항 죽장 입암전투지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산남의진의 역사를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집필자인 이종락·이병기 등은 의진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이순구를 비롯한 참여 의사들의 증언과 유족들의 증거자료들을 참고하여 ‘산남창의지’를 써서 남겼다.

그간 이어진 3회의 연재기사를 통해 확인했듯 일제강점기 참담한 상황에서 보여준 산남의진의 애국심과 투쟁의지는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정환직 부자의 출생지인 영천은 일찍부터 산남의진 의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을 건립하고 관련 행사를 열어왔다. 인근 영덕 또한 당시 의병장이던 신돌석 장군을 추모하며 신돌석기념관을 세웠는가 하면, 성역화사업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산남의진 3대 대장 최세윤이 태어난 포항엔 그를 기념하는 추모비 하나 없다. 산남의진 1~3대 대장들과 함께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700여 명의 의병들은 대부분 포항 죽장 일대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일 터. 그래서 제의한다.

포항시민의 힘으로 도시공원 한 모퉁이에라도 좋으니 산남의진 추모비 하나쯤은 세우자. 이름 없이 죽어간 의병들의 넋을 거두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이제 이 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포항 흥해 사람 최세윤 대장이 지하에서나마 웃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이상준(향토사학자·본지 객원 편집위원) 홍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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