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1969 포항 죽도시장 人 스토리
대 이어 50년 ‘부산천막’ 윤성원 대표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포항시는 환경정화 차원에서 형산강변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를 단속·철거했다.

포장마차 운영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며 삶을 이어가던 상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책을 세워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낮에는 천막으로 된 포장마차를 걷었다가, 저녁에 다시 펼쳐 장사를 하는 방식이 포항시와 상인들 사이에서 합의됐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당시의 포장마차는 천막을 철제로 된 기둥과 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이걸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2~3시간 소요되는 중노동이었던 것.

그 시기 아버지와 함께 죽도시장에서 부산천막을 운영하던 윤성원(52) 대표는 반짝이는 사업 아이디어를 동서(同壻)에게서 얻었다.

“서울에서 판매되는 접이식 천막을 가져와 팔아보면 어떨까요?”

사소한 조언이 부산천막의 매출액을 단기간에 급증시켰다. 1개월 동안 자그마치 200여 동의 접이식 천막을 판매·설치해준 것.

3시간 가까이 걸리던 작업 시간을 10분으로 단축시킬 수 있으니 포장마차 업주들 모두가 너나없이 구매하겠다고 나서는 건 당연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천막을 주문하는 게 보편화되기 전이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효율적으로 연결시켜준 윤 대표는 짭짤한(?) 재미를 봤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에 이어 천막 제작·설치를 직업으로 택한 초반 무렵 이야기다.

 

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땐 인근 대부분의 집이 천막을 사용해 만들어져 천막가게가 호황을 누렸던 때였습니다. 20여 년 전 형산강에 포장마차가 있던 시절에도 전성기를 누렸죠. 지금은 대형 공장에서 기성품 천막이 대량생산돼 유망업종서 멀어졌지만 일흔살 까지는 가게를 꾸려가려 합니다. 시장에서 오랜 시간 가게를 꾸려온 상인은 젊은 시절부터 시행착오를 겪고, 땀 흘리며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결과물들이 쉽게 무너지겠어요?

△ 아버지 뒤 이어 천막 제작·설치를 ‘평생의 업’으로

이제는 경력 30년의 베테랑이 된 윤성원 대표가 천막 제작과 설치를 처음 시작한 건 20대 초반이었던 1993년 11월.

윤 대표의 아버지는 1970년대 초부터 천막 관련 일을 해왔으니, 부자가 50년간 같은 일을 하며 나이 들어온 것이다.

고등학생 때도 여름방학이 되면 아버지의 작업을 도왔다는 윤 대표. 그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수입도 월급쟁이보다 훨씬 나았다고.

그렇게 윤 대표는 부친과 함께 ‘천막’을 자신의 평생 업(業)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새파란 청년이었던 윤성원은 이제 20대 중반의 딸을 둔 중년의 가장이 됐다.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

“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땐 죽도시장 인근 대부분의 집이 천막을 사용해 만들어져 있었다. ‘집수리’가 곧 ‘천막 수리’로 이해되던 시절이다. 천막가게가 호황을 누렸던 때였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이 어렵다. 짐작하다시피 천막 제작과 설치는 이제 사양 산업에 가깝다.”

-천막 가게도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을 받았는지.

“직접적 영향은 크지 않았다. 다만, 식당이나 창고업 등 천막을 필요로 하는 업소의 상인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힘든 것보다는 우리 가게에 작업을 의뢰하던 손님들이 매출 감소 등으로 힘겨워하니 그걸 보는 게 마음 아팠다.”

-천막 가게의 주요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

“상점을 운영하는 이들 모두가 고객이다. 사실 천막은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차양막과 어닝(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동시에 디자인 개념까지 포함된 천막), 농작물을 건조하는데 쓰이는 비닐, 회사나 학교 행사에 사용되는 그늘막, 포장마차 등이 넓게 보자면 모두 천막이다. 그러니, 고객의 범주도 상당히 넓다.”

-그럼 캠핑 장비인 텐트도 천막인 것인지.

“텐트는 보다 세밀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품목이다. 단가와 제작 장비, 재단 기술의 차원에서 볼 때 천막이라 부르기엔 적당하지 않다. 텐트 아래에 까는 방수막은 천막으로 봐도 무방하다.”

△ ‘안전 문제’에 관해선 고객과 타협하지 않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막을 만들고 설치하는 일이 호황을 누릴 때도, 불황을 겪는 지금도 윤성원 대표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아침 8시면 가게 문을 열고, 죽도시장의 하루가 끝나는 해질 무렵까지 부산천막을 지키거나 천막을 주문한 곳으로 가서 설치 작업을 진행한다. 해가 긴 여름에는 밤 8시까지 하루 12시간 작업이 이어진다.

주 5일제 근무가 보편화된 요즘도 윤 대표는 토요일은 일하고 일요일만 쉰다. 30년째 주 6일 근무다.

천막을 주문하고 설치를 의뢰하는 고객들이 많던 과거엔 2~3명의 직원을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좋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혼자서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

조금 큰 규모의 외부 작업을 나갈 때는 일당을 주는 일용직을 찾거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천막 관련 일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 안에서 얻은 보람이 없을 수 없다. 강산이 3번 바뀔 만큼의 기간이었으니 거기서 생긴 ‘사업운영의 원칙’도 있을 법 했다. 그래서 물었다.

-부산천막을 운영하며 가장 기뻤던 때는.

“특별히 기억되는 순간은 없다. 다만 이 일을 하며 결혼해서 두 딸을 낳고 공부시켰다. 아이들이 잘 커줬고 스물일곱과 스물셋이 된 딸들이 이젠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돼준다. 남들은 어려웠다는 IMF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노력해 우리 가게가 입주해 있던 건물도 매입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름의 장사 원칙이 있을 것 같다.

“손님이 요구하는 건 대부분 들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안전’에 관한 건 타협하지 않는다. 일하다가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그렇다. 결과물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든다.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의 안전 문제는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

 

△ “월급쟁이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변하는 세태에 따라 천막을 만드는 일은 갈수록 유망한 업종에서 멀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천막 주문이 들어오면 윤 대표와 아버지가 직접 치수를 재고, 제작해 고객의 업소에 설치까지 했다.

헌데 지금은 대형 공장에서 대량으로 기성품 천막을 만들어 판매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주문제작 천막과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쏟아내는 기성품 천막은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부산천막 역시 어쩔 수 없이 기성품 천막을 판매한지 오래다.

윤 대표도 전업(轉業)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함께 일할 숙련된 기술자를 구하기가 힘들고, 고객도 줄어들면서 우유 대리점을 해보려고 했었다”는 게 그의 고백.

그러나, 평생 천막을 만들고 설치하면서 살아왔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 천막 제작이란 걸 고심 끝에 깨달은 윤 대표는 부산천막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

“외부 작업은 나이를 먹으면 힘이 부쳐 어렵다. 하지만, 가게에서 하는 천막 제작은 일흔 살까지는 할 수 있다. 앞으로 20년쯤은 더 일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웃는 윤성원 대표.

처음 시작할 때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벌이가 훨씬 좋았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직장생활 30년차의 월급보다 부산천막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을 수밖에 없는 시대다. 하지만, 윤 대표는 아직 희망을 말한다.

“장사는 경험의 축적이다. 죽도시장에서 오랜 시간 가게를 꾸려온 다수의 상인은 젊은 시절부터 시행착오를 겪고, 땀 흘리며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한군데, 한군데의 가게다. 그것들이 쉽게 무너지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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