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평전’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책과함께 펴냄·인문

‘장기 19세기’를 다룬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와 ‘단기 20세기’를 다룬 ‘극단의 시대’로 명성을 떨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의 10주기를 앞두고 ‘에릭 홉스봄 평전’(책과함께)이 번역·출간됐다.

홉스봄이 역사에 미친 영향과 역사에 대한 인식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의 저작은 50개 언어로 번역되고 수백만 부가 판매돼 여러 세대의 독자와 학자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줬다. 나아가 그는 공적 지식인이자 좌파의 영향력 있는 대변인이었다.

저자인 저명한 역사가 리처드 J. 에번스는 이러한 홉스봄의 인생 역정을 꼼꼼하게 톺아보면서 그가 일평생 추구한 테마와 이념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진짜 모습, 즉 불안한 10대, 연인,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세히 묘사한다. 또 그가 공산당원으로 한평생 투신한 까닭과 역사가의 길을 선택한 계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 실적에도 모교인 케임브리지의 교수로 임용되지 못한 이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어떠한 생각을 가졌으며 미래 사회를 어떻게 전망했는지 등 홉스봄 삶의 변곡점과 갈등, 그에 따른 내면의 변화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홉스봄의 사적인 측면을 풍부하게 재구성해 그의 총체적 삶을 그려낸다.

이 책은 홉스봄에 대한 기본 정보 없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홉스봄이 워낙에 파란만장한 삶을 오래 살아서이기도 하지만(95세까지 살았다), 이 책의 지은이인 리처드 J. 에번스의 필력과 구성력,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함 덕분이다.

1917년 이집트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혈통의 영국 부모 가정에서 태어나 10대 초반에 고아가 된 홉스봄은 베를린에서 대공황의 위력과 정치권의 변덕스러운 대응을 목격했고, 공산당원이 돼 나치즘에 저항했다. 그로 인해 목숨이 위험해지자 런던으로 이주한 뒤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혁명기의 쿠바를 방문해 체 게바라의 통역사로 활약하기도 했고, 1980∼1990년대에 그의 저술은 영국 정계와 신노동당 운동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한평생 마르크스주의에 충성하면서도 공산주의의 현실에 눈감지 않았고, 그 때문에 줄곧 영국 공산당의 의심을 샀다. 사후에 공개된 영국 정부의 홉스봄 관련 파일을 통해 그가 50년이 넘도록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평생 놓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는 독일 베를린에 살던 1930년대 초반 싹텄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대공황으로 총체적 붕괴가 임박한 듯했고,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직전이었다. 좌파는 공산주의 운동으로 파시즘을 척결하려 했다. 가난에 시달리다가 일찍 부모를 잃은 홉스봄은 공산당에서 가족의 대체물을 찾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홉스봄은 역사 분야뿐 아니라 다른 많은 장르에서도 호소력 짙고 매력적인 작가였다. 그의 방대한 저술에는 단편, 시, 자연 묘사, 여행기, 정치적 소책자, 개인적 고백 등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베를린부터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 선거 이후 처음 열린 프랑스 혁명 기념식, 같은 해의 스페인 내전,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과 뒤이은 냉전, 그 이후까지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하고 참여했다.

홉스봄은 세상을 떠나기 전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적었다. “나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일종의 게릴라 역사가로, 이를테면 포격을 퍼붓는 문서고의 뒤편에 놓인 목표물을 향해 곧장 진격하기보다는 측면의 덤불에서 사상의 칼라시니코프 소총으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역사가로 묘사하고 싶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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