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태수필가
조현태
​​​​​​​수필가

전래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홀아비가 역시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과부를 맞아들여 새 가정을 이루었다.

동갑 나기 두 아들을 키우게 된 이 여인은 마음씨가 착한 부인이었다. 특히 아이들 양육에 있어서 이 부인의 자세는 참으로 만인의 귀감이 될 만 하였다.

부인은 전실 소생이나 자기 소생이나 한 결 같이 대하였다. 혹 선후를 가를 일이 생기면 언제나 전실 자식을 앞세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실 자식은 점점 비루먹은 강아지 꼴인데, 그 부인의 친자식은 탐스럽게 잘 자라는 것이다.

보기에는 전실 자식에게 더 잘 하는 것 같은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부인을 의심하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는 전실 자식을 위하는 척하면서 남이 안 볼 때는 전실 자식을 구박하는 영악한 여인인가 하고. 그러나 부인의 행동을 면밀히 살펴보면 남이 있든지 없든지 부인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어느 날 남편이 우연히 부인이 잠든 방을 보게 되었는데 부인은 전실 자식을 품에 안고, 자기 자식은 건너편에 누인 채 잠자고 있었다. 이를 본 남편은 부인을 의심한 것을 크게 뉘우쳤다. 전실 자식과 부인이 데리고 온 자식에 대한 발육 상태의 차이는 순전히 생리적인 차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이 집안의 중요한 일로 먼 길을 떠났다가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집안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방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이상한 현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날도 부인은 전실 자식을 자기 품에 안고 자고 있었고, 부인의 친 자식은 건너편에 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부인의 몸에서 이상한 기류가 나와 품에 안은 전실 자식을 건너 뛰어 부인의 친자식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아, 그렇구나,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민담 같은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인간 세상에는 물론이요 식물이나 동물의 세계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신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양심이나 정신적 측면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윤색되지도 않는다 하겠다. 이 특징은 남에게보다 자신에게 도드라지기 때문에 스스로 속이지도 못한다.

이름하여 ‘자신과의 싸움’ 또는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한다.

어질고 좋은 마음을 양심(良心)이라 한다면 인간 사회를 이것 하나로 꾸려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원망도 불평도 없을 것이요, 거짓과 사기로 봉합하는 일이 없이도 남에게 무한한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진부하고 바보스러운 헛소리 같아도 또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말.

“초개만큼이라도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서 다함께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