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옮겨온 영덕향교와 의병장 신돌석 장군

옮겨지은 영덕향교.

#. 안쓰러운 영덕 향교

바닷가 영덕 강구항을 지나서 북으로 가다가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영덕읍이 나온다. 영덕 향교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길 접어들어 숨은 듯이 말없이 길손을 맞이한다. 보통의 향교가 시내중심부에 있기에 평지에 넓게 있거나 산을 백그라운드로 등지고 있는데 영덕향교도 조그마한 언덕을 등지고 있지만, 아파트가 점령해버려 숨이 막힌다. 규모도 작고 사람 하나 없는 향교는 그냥 마지못해 서 있는듯 했다. 영덕향교가 옮겨와야 할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영덕향교는 초라함을 넘어 안쓰러웠다. 이처럼 집이나 건물들은 장소가 대단히 중요하다.

향교나 서원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어지기에 문을 들어서면 중심 되는 강당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강학 공간인 동무, 서무가 있다. 뒤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있는데 영덕향교도 이를 충실히 따랐다.

영덕향교는 1410년(태종 10년) 영덕읍 덕곡리에 창건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영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향교를 교실로 사용한다. 향교의 존재가치로 중요한 위폐는 영덕읍 화개리의 가옥을 구입하여 봉안한다. 10년 뒤(1924년) 영덕공립보통학교의 교사가 신축되면서 위폐를 다시 옮겨온다. 1940년에는 1군 1향교의 방침에 합병된 영해향교의 위폐를 옮겨와 봉안하고 영덕 향교의 위폐는 묻어버린다.

1950년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영덕 향교건물들은 불타고, 1965년 영덕 유림들의 뜻을 모은 성금으로 화개리 현 위치에 옮겨지은 것이 오늘날의 영덕 향교인 것이다.

아쉬움 안고 큰길로 나오자 길옆에 항일 의병장 신운석(1839~1896년) 장군 순국기념비가 오늘의 영덕을 지켜보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 야금야금 조선을 집어삼킬 때 분연히 일어나 맞서다 죽은 선열들이 많다. 이 근처에서 태어난 신운석 장군도 1896년 영덕의진의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과 영덕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 패하고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고진 고문에 혀를 깨물고 항거하다 총살당한 분이다. 머리 숙여 묵념하고 축산면 신돌석 생가로 향했다.
 

영덕향교 명륜당서 바라본 전경.
영덕향교 명륜당서 바라본 전경.

#. 생가는 쓸쓸하고

옛 영해지역인 영덕 축산면 도곡리 신돌석(1878~1908년) 생가를 찾았다. 사람 하나 없는 주차장에 생가도 수리한다고 어수선하여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욱 쓸쓸했다. 그러면 이곳에서 자랐던 신돌석(본명 신태호)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생가 인근 도곡2동(복대비) 외가에서 태어난 1878년은 조선왕조의 막바지로 온갖 모순을 안고 기울어져가는 시기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운명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시대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 보통사람이 하기 힘든 역사의 한 획을 긋는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신돌석은 장대한 신체로 힘이 장사로 많은 일화를 남긴다. 그리고 어릴 때는 상당한 개구쟁이였고 골목대장을 뛰어넘는 동해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한 민족을 사랑한 의병장이었다.

1894년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걸고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난다. 다음해인 1895년 8월에 일본낭인(무사)들이 밤중에 궁궐에 침입하여 민비(명성황후) 사진 들고 민비와 비슷한 궁녀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불태워버린다. 이른바 민비시해사건인데 전국의 의병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난다. 신돌석도 1896년 3월 13일 19살 나이에 영해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의 많은 업적으로 영해의병의 중군장이 되어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05년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빼앗기는 주권국가로의 지위를 잃었다. 이에 신돌석은 동생 신경우와 1906년 생가가 있는 이 도곡 마을에서 다시 300여명의 ‘영릉의병장’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전쟁이란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기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을 한방에 보내 버린 것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이었다. 만약이란 가정 하에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핵으로 인간은 말살될 운명에 처해있다. 의병들이 아무리 민족적 울분으로 용맹한 정신으로 무장했더라도 막강한 신식무기의 일본을 상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신돌석이 용맹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동해안 산악지대를 이용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었다.

이 생가도 1850년경 신돌석 장군 아버지 신석주가 지었으나 1940년 일제는 독립의지를 꺾고자 불태워 일부는 무너졌고 1942년 일부를 새로 지어 기와집으로 꾸몄으나 1955년 현재의 초가로 복원했고 2020년 다시 수리하고 있다. 뻥 뚫린 벌판에서 모진 겨울바람이 소리 없이 날아온다.
 

신돌석 장군 흉상.
신돌석 장군 흉상.

#. 태백산 호랑이의 업적

신돌석 장군의 의병들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아 가는 곳마다 호응을 얻어 보호를 받았고 아버지는 가산을 털어 아들을 도왔으며 매부도 처남도 모두 신돌석 장군 휘하의 의병에 참여했다. 상놈 의병장이 양반을 능멸했다고 목을 쳐버리는 일이 횡행하던 당시 평민 신분으로 의병장이 된 신돌석 장군 의병 휘하에는 양반들도 있었으니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다. 어릴 때 30리 떨어진 서당에서 학문을 익힌 것도, 울산에 만석꾼 아들로 판사 그만두고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던 박상진 의사 이강년 의병장들과도 깊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웃고을 울진 평해 월송정에 올라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이처럼 한탄하면서 사나이 포부의 시 한 수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랄 때 동학혁명과 고향 영해에는 탁월한 혁명가 이필제의 난(1870년)을 듣고 자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스포츠나 전쟁에서 뛰어난 기량의 선수도, 지략이 뛰어난 장군도, 승리하는 업적이 없으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그러면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은 신돌석 장군의 업적은 무엇인가?

300여 명 휘하의 의병으로 영해부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울진에서는 바다에 떠있는 일본 병선 아홉 척을 부수었다. 울진은 1890년부터 일본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전복과 해삼 등 자원을 쓸어가 어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지역이다. 1907년에는 의병들이 3천여 명으로 많은 의병부대가 되어 동해안 영덕, 울진, 영양, 청송, 경주와 강원도 일대까지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인들은 신돌석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신돌석 명성을 듣고 해산당한 구식군대와 전국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의병을 말리러온 영해군수 경광국은 “누가 그 의기를 그르다고 하랴마는 독단으로 군대를 일으키려하니 말리려온 것뿐이오. 눈빛은 햇 불같고 다리는 하늘을 건널 만 하니 참으로 장군이로다.”했고 박은식(1859~1925년)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부대는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했다.

 

신돌석 유적지 아래 다양한 태극기 벽화.
신돌석 유적지 아래 다양한 태극기 벽화.

#. 도끼에 목은 날아가고

이렇게 되니 일본군들은 신돌석 장군 잡는데 혈안이 되었다. 투항자 면책특권의 귀순법으로 죄를 묻지 않는 회유정책과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여기에 우리의 영웅은 쓰러진다. 인간생존에 직결되는 기후가 의병들에게 겨울은 혹독하여 의병들도 흩어지고 군량미도 떨어져 1908년 따뜻한 내년을 기약하고 전략적으로 해산한다.

“지금 적들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는데….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만주나 중국으로 가서….” 이런 마음을 먹고 몸을 피해 다니다가 1908년 12월 11일 밤 9시쯤 영덕군 북면 눌곡(현 영덕군 지품면 눌곡)의 옛 부하였고 고종사촌(이종, 외사촌 설도 있음) 김상렬(일명 김자성) 형제 집으로 갔다. 상금에 눈이 먼 형제는 반갑게 맞이하고 독한 술을 먹이고 12월 12일 밤 1시쯤 깊이 잠든 신돌석의 목을 도끼로 내리쳤다. 김상렬 형제는 그의 시체를 메고 일본 군대로 갔다. 신돌석의 머리라고 상금 달라 하니 일본군 장교는 “산사람 잡아오라했지 죽여오라 했느냐”며 호통치고 돌려보냈다.
 

공사중인 신돌석 장군 생가.
공사중인 신돌석 장군 생가.

일본 측 기록은 김상렬, 김도룡 부하와 갈등이 빚은 결과로 우리 측은 현상금(몰래 상금 주었다는 설) 때문이라 했다. 또 돌로 쳐 죽였다는 설도 있다. 시체는 영덕군으로 옮겨져 시신확인 작업을 거쳐 가족에 인도되어 생가 뒷산 봉우리에 묻혔다가 1971년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부인 한재여 여사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불에 탄 집에서 힘든 삶을 살았고, 유일한 외아들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

이렇게 하여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기에 태백산 호랑이라 불린 신돌석 장군은 처참하게 죽는다. 그것도 일본군과 싸우다 죽었으면 덜 원통하지만 현상금에 마음이 뒤집힌 동족 친척에게 죽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생가에서 나와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성역화해 놓은 곳에 갔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허비와 기념비도 옮겨 놓았다. 전시관과 사당을 혼자서 쓸쓸한 마음 안고 둘러보았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