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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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이야기이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8월 하순 김포공항의 오후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간단한 짐검사를 마치고 대합실로 걸어나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공항 실내에서 웅성거리는 한국사람들의 한국말은 내게 달콤하게 들려왔다.

여기서 다시 포항에 가는 비행기는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고 후덥지근한 몸을 잠시 물에 담그고 여행의 피로를 풀고 싶었다. 긴 줄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택시를 탔다. “어디 가시죠?” 괜히 화난듯한 모습의 기사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근처 아무 곳에서 목욕을 하고 싶은데요…. 아, 화곡동 까지 갑시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리시죠. 그렇게 가까운 곳은 안갑니다” “네??” 그 다음은 말할 것 없이 대화는 거칠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나는 화곡동 네거리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사우나 간판이 보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불과 2시간 전의 일본 큐슈 오이타 공항의 택시기사가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하이, 하이, 도모 아리가또 고자이 마쓰다(네, 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던 모습, 손님을 제일로 여기며 항상 친절히 대하던 그 모습, 정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던 그 깔끔한 모습이….

실제로는 내가 들렀던 관공서, 기업, 가게의 모든 장소가 그렇게 친절헀다. 당시 여행은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방송국의 현지 프로그램을 위한 여행이었다. 그 당시 사회 구석구석을 보고 경비행기를 타고 공중 취재도 하면서 느낀 건 “우리는 아직 멀었구나”였다. 우리는 우리가 친절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제한된 친구, 가족 간 또는 이해가 얽혀 있는 사람 간에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택시기사도 그렇지만, 길에서 부딪혀도 “미안하다”는 말도 안하는 낯선 사람들….

친절과 정보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별로 관계도 없고 비교도 안되는 두 개의 단어이다. 사실 한국은 정보화가 웬만한 선진국보다 낫다고 하는데 진정한 정보화는 공평성이 보장되는 공개(Openness)와 약속을 지키는 준수(Observance)를 기반으로 한다.

결국 친절은 공개와 준수의 산물이다. 한국인들은 아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식사값을 지불하려고 하지만 뒤따라 들어오는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잡고 서있는 예의는 부족하다. 택시운전사가 친절해야 하는 것은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를 받는 자의 약속이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친절한 건 형평성의 공개 원칙과 부합하지 않고 택시운전사가 친절하지 않은 것은 준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니가타의 한 호텔을 떠나던 날 일주일간을 주말도 없이 우리를 안내하던 현의 한 직원이 안녕의 표현으로 굽혔던 그 허리를 잊을 수 없다. 그 굽힌 허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 책임감으로 가득찬, 정돈된, 깨끗한 질서있는 사회에 놀랐던 기억이다. 대부분의 물질적 기반과 문화가 선진화 되고 있지만 친절만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