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화씨의 책들.

누군가 내게 언제부터 독서에 대한 취미를 붙였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이러하다.

먼저 독서는 나에게 취미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독서 감상문을 써오기 위한 책 읽기였으니 말이다. 매번 검사 받아야 하는 숙제라 여기니 재미있다거나 신나는 일은 더욱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쓰시던 부모님전상서를 의미도 모르면서 읽은 것이 그 시작이었을 거라고 얼버무리고 말 성싶다.

분명한 것은 이런 일들이 학기 초 교과서 읽기로 이어졌다. 이렇게 책을 가까이 하며 사십이 넘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지난 주말 찾았던 고향집 거실 책장에는 중·고등학교 다닐 시절 사 놓은 시집이나 소설책, 잡지, 또 열기도 겁나 보이는 두꺼운 전공서적들이 여전히 촘촘히 꽂혀 있다. 볼 때 마다 내 인생의 한 단편을 보는 것 같아서 아련해진다.

내가 살았던 시골은 책 한권 사볼 서점이 마땅치 않았다. 당연히 학교도서관은 책을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만난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는 나의 첫 책이었다. 그 후로 계속 읽게 된 안데르센 동화들. 여름날 더위 날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 내가 생각한 그 범인이 맞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중학교 때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여자의 일생, 언젠가 독일에도 가보고 싶게 만든 내가 좋아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는 목련꽃 아래에도 서 보았다. 4월에 아파트 화단에 목련꽃이 피면 넌지시 눈길을 건네곤 한다.

한 동안 온몸으로 생각했고 ‘내가 아큐 형 인간은 아닌가 ’ 했던 노신의 ‘아큐정전’, 부끄러움의 시인 윤동주, 현진건, 이효석의 소설들. 러시아 소설 속 등장인물들 이름은 왜 이렇게 길고 어려운지 입에서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부활’의 남자 주인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흘류돌프는 메모를 해가며 외운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나’였다고나 할까.

자취를 했던 고등학교 때 토요일 오후가 되면 내 발걸음은 서점으로 향했다. 진열된 책의 제목에 마음이 꽂혀 책장을 들추게 되고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 잠시 몰입하는 기쁨은 도둑의 긴장감처럼 황홀했다. 이렇게 구입한 책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독서동아리 책이 되었다. 스스로 만든 동아리라 진실은 독서보다는 모여서 수다 떨기로 더 바쁜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먼지 앉은 책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때론 소중하기도 하다.

나는 식자(識者)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자타가 공인하는 ‘독서광’은 아니다. 그러나 다독가이고는 싶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주마간산으로 훑은 책을 다시 보고자 했다. 하지만 한갓지게 독서한 기억이 없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기웃기웃한다. 여행이 아쉬운 지금 앞선 작가들의 여행기를 덥석 빼 든다. 오늘은 산티아고를 넘어 남미여행기에 푹 빠진다. 독서의 즐거움에 여행의 기쁨도 더해진다.

책과 함께하는 일상이 오롯하다.

/허명화(포항시 북구 아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