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사회이론가와 풀어보는
사회적 삶이라는 실타래 ①

경주 성동시장의 정겨운 풍경. /경북매일 DB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근대화가 한참 진행된 후에도 여전히 긍정적 의미를 가져왔던 인정(人情)이나 의리(義理)와 같은 말이 언제부턴가 ‘합리적’이라는 말에 의해 대체되어왔다. 말 자체로 보자면 ‘합리적(合理的)’이라는 수식어는 이치에 맞는, 그에 합당하고 부합하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에 대한 영어의 대응어인 rational이라는 말에는 이성(理性, reason)에 부합하는, 즉 어디에서나 옳고 현실에 부합하는 규범과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가 쓰는 ‘합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 본래의 것이 아닌 앞선 서구에서 들어온 더 발전되고 세련된 태도를 지칭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어찌 되었건 이 말은 젊은 세대나 도회적 삶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유인하기 위한 마케팅 슬로건으로 광범하게 쓰이면서 자신을 전통적인 보수가 아닌 ‘합리적’ 보수로 지칭하는 정치인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현대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일종의 여행객이고 늘 어느 정도 낯선 이로서 서로와 조우하고 세상을 접한다.

‘환대’는 단지 능란한 처신과 체면을 위해 면식있는 이들을 열심히 대접하는 척하고 떠받들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등한 존엄을 가진 또 다른 동류 인간으로서 낯선 타인을 대접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말의 현재 쓰임은 뭔가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지거나, 단지 이전부터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통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마트에 가면 바로 보게 되는 합리적 가격, 합리적 소비라는 말은, 부풀려져 있거나 그렇게 비쌀 이유가 없는 상품의 유통비용을 줄이고 브랜드 로열티를 없앤 가격에 제공하고 구매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합리적이라는 말이 ‘납득할만한(reasonable)’이라는 의미보다는 조금도 손해 보고 살지 않겠다는 근래에 들어 더욱 강팍해진 한국사회의 분위기, 지고는 못사는 현대 한국인의 메마른 성벽을 비추어주는 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필자는 오랜 유학생활과 수도권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대구에서 또 다른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지 1년이 되어간다. 이런저런 예상과는 달리 대구에서의 삶은 사람들 사이가 조밀하고 서로 밀치고 당기고 문제 삼고 삿대질이 빈번한 수도권에서의 삶과는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인구 250만이 넘는 대도시임에도 낯선 이들 간의 만남에조차 인정과 예의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신선했던 것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서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이웃사촌이나 공동체적 삶 같은 말에 딱히 열렬히 공감해본 적이 없음에도 필자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있는 사람들 간에 서로 우호적인 감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척’이라도 하는 것, 그 정도 ‘수고’를 할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은 꽤 중요한 차이(쓸모있는 것을 넘어서)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건전하고 쾌적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기실 눈에 안 보이는 ‘진심’이라기보다는 이런 ‘척’과 ‘제스처’의 관행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 부여하는 의미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찬호 선생같은 사회비평가들은 한국사회의 사회적 삶이 서로 주고받는 모멸감과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원한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필자의 체험으로 보건대 이 점은 수도권 도시에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수도권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손해 볼까 봐 늘 전전긍긍하고 자신을 문제 삼을까 싶어 먼저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 수도권이라는 그 좁은 지역에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 산다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사실에 기인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상승해 있는 부동산 가격과 천만 자영업자의 파산을 먹고 사는 높은 월세는 수도권에서의 삶을 강팍하고 성마르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의식변화의 촉구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물질적 조건이지만 사태의 더 본질적인 면은 사회와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에 있는 것 같다.

10년 만에 돌아온 한국사회는 어느 곳을 가던 어디에 전화하건 똑같은 ‘아기 목소리,’ 걸그룹의 말투를 듣게 되는 곳이었다. 매장에서의 친절은 번지르르하고 표준화되어있고, “2만원 되시겠습니다”라는 표현처럼 돈 액수에까지 경어를 붙이는 이상한 존대법의 인플레가 극에 달했지만 정작 그런 말들에서 조금의 마음도 배려도 느낄 수 없다. 그에 비해 필자의 집 주변에서건 포항에서건 안동에서건 사람들은 악에 받쳐 장사하는 모습이 별로 없다. 애써 호객행위하고 일부러 친절한 척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판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물어보면 스스럼이 없고 성의를 보이며 응대해준다. 물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린 상황이나 필자가 이들 속에 이웃이 되었을 때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런 수준과 상황에 국한되서라도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사회학자 알랭 뚜렌(A. Touraine)은 현대적 인간(modern man)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짐가방을 들고 이제 낯선 곳으로 떠나려는 여행객의 모습이라고 했고, 뉴미디어의 철학자 삐에르 레비(P. Levy)는 정보화시대로 불리는 오늘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윤리는 ‘환대(歡待)’라고 했다. 현대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일종의 여행객이고 늘 어느 정도 낯선 이로서 서로와 조우하고 세상을 접한다. ‘환대’는 단지 능란한 처신과 체면을 위해 면식있는 이들을 열심히 대접하는 척하고 떠받들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등한 존엄을 가진 또 다른 동류 인간으로서 낯선 타인을 대접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환대의 전통을 민중적 차원에서 ‘인정(人情)’이라는 말로 간직해 왔다. 공자가 말한 ‘인(仁)’이라는 유교적 덕목은 차마 그럴 수 없다, 인정 상 그럴 수 없다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서와 정오(正誤) 관념에 의존하는 윤리였다.

물론 현대화된 사회, 수많은 산업과 직종, 이질적인 사회계층, 집단으로 분할되고 복잡해진 근대사회에서 이 인정의 윤리는 결코 충분치 않다. 합리적, ‘합리성’이라는 구호는 인정과 의리, ‘인간적인’ 등의 말이 끈끈하고 불합리한 결탁과 부패, 권위주의적 태도와 부당한 기득권의 옹호하는 말에 다름 아닐 때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삶은 합리성과 합리적 태도가 퍼지고 우세해지면서 더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되었을 뿐 획기적으로 더 공정한, 무엇보다 더 견딜만한 것이 된 것 같지는 않다. 맹목적이고 날이 선 합리성이 발달하는 동안 우리의 삶은 인정이란 말을 통해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정과 합리성, 이 두 말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혼란스러움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선도지역으로서뿐 아니라 전통과 보수의 상징으로도 자천타천 비쳐지고 있는 우리 대구경북지역에서 더 가중되는 것 같다. 서로 갈등하고 있는 양 진영 중 어느 한 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에는 복잡한 현실과 가치의 상태를 ‘양가적(兩價的)’이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의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 또한 그런 양가성과 복합성에 충실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충분히 그리고 정직하게 의식하면서 한국정치, 대구경북지역의 정치가 갖는 고유한 난맥을 살펴보는 일로부터 우리의 사회적 삶이라는 엉켜있는 실타래를 함께 풀어보기로 하자. /구자혁 경북대 강사(사회학)

 

구자혁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사회학과에서 석사, 미국 Virginia 대학교에서 사회학박사 취득.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에서 박사후연구원, 학술연구교수 역임, 현재 경북대사회학과 강사. 최근의 저서로 <꿈의 사회학(공저)>, <역동적 현대화와 한국인의 ‘우리’: 한국 집단주의의 논리와 역사적 형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