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1월 6일 월요일 저녁. 광주 동명동에 자리한 ‘서향재(書香齋)’에 도착한다. 서책의 훈향이 퍼져 나가는 집, 서향재. 이곳에서 30년 넘도록 시민들이 모여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고 토론해왔다고 한다. 한 세대에 이르는 긴 세월, 세 번째 월요일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향재 독서모임 이름이 ‘세월회’라고 말한다.

그날 모임에서 나는 ‘유라시아와 격동의 20세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포괄적인 인문학 서책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그 일부를 파워포인트로 정리해 선보인 것이다. 20세기 전체를 어찌 90분 남짓한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19세기에 강연 일부를 할애하였기로 시간은 더욱 짧아지고 말았으니.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20세기의 고갱이는 얼추 전달한 듯하다. 서향재에 빼곡하게 놓인 의자가 모자라 몇 사람은 마룻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된다. 듣는 이들은 불편했겠으나, 말하는 자로서는 퍽이나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유명하지도 대단한 인간도 아닌 자의 강연을 함께 해준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도의 농가주택에 살면서 붙인 당호가 ‘파안재(破顔齋)’이니, 파안재 주인이 서향재로 마실 나가서 한 마디 전한 셈이다. 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은 훈훈한 저녁이었다. 돌이켜보면 2차 대전 후에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 20세기 한복판의 일이다.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숱한 사건과 사변이 꼬리에 꼬리를 문 20세기 후반기지만, 세계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1-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커다란 전쟁은 없었으나, 한국동란을 필두로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이 뒤를 이었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천안문사태로 숱한 인명이 살상되었다.

20세기를 두 가지 말로 요약한다면 필시 문명과 야만이 되리라. 한편으로는 과학과 기술이 불러온 물질문명과 의약과 보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삶의 질이 풍요로워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1917년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내전, 1-2차 세계대전과 국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화가 벌어진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중동의 전운은 전쟁의 참화를 예고한다. 1월 3일 있은 미군의 카셈 솔레이마니 이란 군사령관 폭살(爆殺)이 좋은 본보기다.

이라크를 방문 중인 이란의 전쟁영웅 솔레이마니를 처단해버린 미국의 처사에 국제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은밀하고 야비하게 군사작전을 실행하는 나라가 어찌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운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의 악행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21세기 스무 번째 벽두에 자행한 행악질은 실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서향재에 모인 시민들과 함께 차분하게 돌아본 20세기의 교훈은 단출하다. 야만을 경계하면서 문명을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다. 묵묵히 자신과 사회와 세계와 역사를 돌이키고 사색하는 시민들의 서향재는 오래도록 환하게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