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왜 사람들은 다수에 복종하는가? 더 많은 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더 많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에 나오는 이 말은 민주주의가 채택하고 있는 ‘다수결(多數決)’ 의사결정 방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다수결은 어디까지나 결정이 시급한 안건에 대해 만장일치 처리가 어려울 때 선택하는 ‘차선’의 방안임을 우리 정치권은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대한민국 국회는 낯설고 해괴한 장면을 잇달아 연출하고 있다. 사상 최초로 게임의 룰인 선거법까지 여야 합의가 아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우격다짐으로 올린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교섭단체’중심 국회운영 전통을 깨고, ‘4+1’이라는 얄궂은 짬짜미 ‘바꿔먹기’식 협잡 꼼수를 서슴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필리버스터에 부득부득 뛰어든 여당 의원들의 한심한 저질 코미디는 또 뭔가. 결과론적이지만 호남의 분열정치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 역설이 호남정치에 정확하게 먹혀들고 있다. 물론 보수정당이 전혀 대안이 못 되는 호남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호남에서는 민주당 싫으면 민주평화당 찍으면 되고, 그도 싫으면 대안신당 찍으면 된다. 그런데 영남에서는 한국당 싫은 사람은 민주당 찍는다. 그러니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앞으로도 영남 보수정치는 성공할 개연성이 높지 않다.

이래저래 영남의 보수정치는 퇴락해가고 있다. 민심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는 일에 무디기 짝이 없는 자유한국당이 문제다. 오랜 세월 기득권층이 되어 누리기만 한 탓에 돌발변수에 대응하는 능력마저 퇴화했다. 스스로 변화하는 일에도 서툴기 짝이 없다. 서푼 어치도 안 되는 패잔권력 부여잡고 연장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이 모습대로라면 앞으로도 영 가망이 없을 조짐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정치인들의 결사체라고 자부해온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소수 야당 시절 그토록 눈물 콧물 흘리며 아니라고 외쳤던 꼴통 보수 독재세력의 횡포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아니, 긴 세월 서럽게 당하는 동안 배운 기법까지 총동원한 그들의 다수 독재는 훨씬 더 교묘하고 악랄하다.

누더기를 넘어서 걸레가 된 선거법이 파생할 혼란에, ‘검찰 개혁’이라는 포퓰리즘으로 거짓 포장된 무소불위의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이 빚어낼 파열음이 또 얼마나 많은 국론분열과 패싸움 난장을 펼쳐낼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타락한 다수결’의 몸쓸 관성이 ‘양보와 타협’의 덕목을 모조리 망가뜨리면서 이 나라 정치를 얼마나 더 피폐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 파스칼의 말을 의역하면, 다수는 그저 ‘힘이 있다’는 뜻이지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부디 ‘우리는 옳다’고 말하지는 마시라. 멀쩡한 정신으로 국민노릇하기 참으로 힘든 세모(歲暮)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