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진 규

토요일 저녁이면 그는 홀로 쌀을 씻고 나는 홀로 차를 마신다 어김이 없다 그는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그는 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고 있으며 나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그 까닭을 여기 밝혀 적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쌀 씻는 소리가 차 마시는 소리가 우리들의 암호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암호는 암호가 된다 하지만 그와 나의 암호의 한 모서리가 조금씩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음을 오늘 보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미구에 모든 것이 탄로되리라)

시인이 차 마시는 소리, 쌀 씻는 소리를 암호라고 말하는 것은 은밀한 소통의 방식을 말하는데 그 속엔 비밀스러움이 숨어 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에서 그 암호의 모서리가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그 은밀한 소통의 꿈이 닳고 노출되어가는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염려하며 닥쳐올 건조하고 우울한 시간들을 예감하며 경계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