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몇주 전 주말 가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듯 전북 장수군의 장안산(長安山)엘 올랐다. 평소 산을 좋아하며 산행을 무척 즐기는 편인데, 그 무엇에 저당 잡혀 이다지 뜸하게 산을 찾았는지, 상기된 풍엽(楓葉)들의 두런거림이 온통 밀어처럼 들리는데 말이다.

산을 찾으면 고향처럼 푸근하고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다. 낮은 등성이건 험준한 고산이건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넉넉하고 한결같은 품새로 맞이한다. 철 따라 옷을 갈아입으며 신선한 공기와 향긋한 바람과 청아한 소리를 들려 준다. 생각이 번잡하거나 세파에 찌든 사람들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씻기도 하고, 나무숲을 거닐며 차분하게 치유 받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땀방울로 산을 오르며 자신의 의지를 단련하기도 하고, 애써 정상에 오른 이들은 담담하게 성취와 희열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렇듯 산은 찾거나 오르는 사람들을 반겨 맞고 위무하며 늘 그 자리에 서있다.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산밭을 지나 어쩌다가 산행 초입부터 길을 잘못 들어 등산로가 없는 비탈로 접어들었다. 풀섶이 발을 휘감고 잡목이 앞을 가리니, 발길은 더뎌지고 연신 힘겨움만 더해갔다. 단풍에 젖어드는 순조로운 산행을 기대했건만, 예기치 못하게 길 아닌 험로를 헤쳐가야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 헤매듯 올라가다가 원래의 순탄한 등산로를 찾아 가까스로 정상에 이르게 됐다. 등산은 어쩌면 모험을 시도하는 청년의 패기같은 것이다. 고지를 향하는 다짐을 눈빛으로 아로새기며 단호하게 앞만 보며 내닫는 굳건한 발걸음이다. 그러나 무난할 것만 같은 산행도 의욕만 앞서고 준비나 방향에 착오가 생기면, 이처럼 시작부터 고난을 면치 못하는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버겁고 부치는 숨결로 산마루에 서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전경에 장쾌함이 솟아난다.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다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땀의 결정, 중년의 성취, 환희 같은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쓰다듬고 너울너울 구름 꽃의 환호 속에, 저 멀리 덕유산, 지리산의 산세를 조망하는 것은 흔치 않은 불역쾌재(不亦快哉)가 아닐까!

‘파도의 외침으로/안겨오는 저 물살/고원에 이는 격정/무리 지어 부신데/처연한 흰 손의 나부낌/가을날은 퍼덕인다’ -拙시조 ‘사자평에서’ 첫 수(1997)

1천200m 고지의 장안산 동쪽 능선으로 하산하며 드넓게 펼쳐진 억새밭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이번 산행의 덤이었다. 무엇을 향하는지, 누구를 보내는지 긴 목을 뽑아대는 억새가 자꾸만 흔들어대는 건 아쉬움인가, 아우성인가? 온통 바람기에 취할 듯한 억새의 몸부림에 자신도 덩달아 취하며 그냥 가을에 빠져들었다. 이렇듯 정상에 올라 비우고 재우고 느긋한 걸음으로 하산하며 즐기는 것은 노년의 안도와 여유가 아닐까 싶다.

짧은 하루의 힘겨운 산행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낀 알찬 여정이었다. 오르고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과도 비슷한 산행, 산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경외감으로 산을 즐겨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