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지식 상황의 특징 하나는 지식의 범람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충분한 양의 지식 정보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할 때 자본 쪽을 옹호하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지식들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반대로 노동 쪽을 강조하는 지식들을 선호할 수도 있다.

두 방향 다 지식은 넘쳐난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공부하든 그 선택을 위한 공부거리는 널려 있다. 어느 방향이든 상당한 수준까지는 논리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제공되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식민지 근대화 문제를 논의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했고, 때문에 일제에 의한 지배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을 위한 지식은 그 시대의 통계자료들이나 지금 시대의 연구논문들 가운데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할 만한 통계자료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그 시대에 한국의 물자와 노동력이 얼마나 많이 유린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

근대화 과정은 수량중심적으로 계산되곤 하기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더 많고 또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외형적,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측정가능한 근대과학, 근대경제학의 약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근대과학, 경제학이 아직 측정하지 못한 인간고통의 양적, 질적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면, 아니 거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를 반박할 만한 사실적 자료들을 보다 성실하게 모아놓을 수만 있다면 일제에 의한 폭력적 지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얼마든지 치밀하게 재조립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따라서,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지식을 쌓아 나가고 무엇을 위해 논리를 정당화 할 것인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그 자신의 선택이다. 만약 폭력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근대화가 완숙단계에 접어든 오늘도 여전히 비민주적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기 쉽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그와는 다른 길이 열려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지배와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논리는 생리적으로 싫다. 나의 이 생리가 학문적으로도 더 많은 올바름을 향해 열려있기를 말할 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