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

우리의 일상은 모두 만남으로 이어진다. 사람과 만나고 사물을 대하며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간다.

또한 문명과 만나고 문화를 접하며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만남의 끈을 이어간다. 만남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고리와 인연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만남에서 비롯되는 촘촘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선물같은 만남과 인연을 바탕으로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사회생활을 영위해간다.

그래서 삶은 끝없는 조우요 부단한 해후라 했던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씨족이나 부족단위로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상대대로 한 지역에 살면서 계(契)나 두레, 향약(鄕約)같은 것을 정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협력을 도모했다. 바쁘고 힘든 농사일을 같이 하며 협동심과 공동체의식을 키워왔다.

그것은 곧 단위 부락의 단합과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을에 큰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서로 돕고 위로하며 다독이는 인정 어린 풍습이었다. 어쩌면 동심협력(同心協力)과 상부상조의 미풍은 우리 민족의 큰 저력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와 같은 미덕의 기저에는 만남과 인연이 있었다.

시대의 가치와 사회적인 양상이 많이 변모된 요즘은 어떤가? 지연, 학연 등에서 비롯된 공동체와 이익집단 등 특정한 목적이나 이념을 내세운 각종 단체와 모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진정한 마음으로 진지한 의견을 개진하며 견제와 균형으로 조직의 순기능적인 면을 살리기 보다는, 배타적이며 맹신적으로 비방과 왜곡을 일삼는 단체가 허다하다. 이른바 ‘내로남불’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대부분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면 ‘차이’는 ‘차별’이 되고, 사회는 조화의 빛을 잃은 흑백지대가 된다. 그러나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그에 대한 관심이 상대에게 전해지면 ‘다름’은 점차 ‘같음’이 되기도 한다.

최근들어 국내외적인 정세(情勢)가 심상치 않게 흐르는 것 같다. 무역의 파고와 안보의 불안이 가중되고 정치, 사회적 갈등과 경제상황이 바닥을 치는데도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사회단체 등에서는 아전인수격으로 소모적인 논쟁만 벌이고 있다.

한데 힘을 모으고 지혜를 짜내도 부족할 판에 목전의 유불리만 따지니, 한심하고 우려스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상대방과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와 타협으로 합리적인 중지를 모아가는 슬기가 필요하다. 독단과 배척은 고립과 파멸을 자초하고 비난과 반대를 위한 반대는 공동선을 해칠 뿐이다.

하루하루 선물같은 만남이 계속 유지되려면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과 겸양의 미덕으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혀나가야 한다.

더불어 손잡고 아름다운 동행으로 나아갈 때 모두의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붕정만리(鵬程萬里)로 향하는 대승적인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