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얼음은 옥살이 하는 죄인들에게도 일정량 나누어졌다
귀한 얼음은 옥살이 하는 죄인들에게도 일정량 나누어졌다
  • 등록일 2019.08.05 20:18
  • 게재일 201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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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관리와 죄인 모두에게 귀했던 얼음

안동댐 석빙고에서 재연된 조선시대 장빙제. /경북매일 DB

얼음은 뜨거웠다. 시쳇말로 ‘핫 아이템’이었다.

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다. 겨울철에 얼음 준비해서 창고에 넣고 보관한다. 여름이 시작되면 얼음 창고를 열어서 얼음을 사용했다. 얼음은 필수품이었다. 얼음을 구하고, 보관, 사용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얼음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다.

겨울에 얼음을 마련하는 이들은 빙부(氷夫)다. 빙정(氷丁)이라고도 한다. 얼음 일하는 장정이다. 빙부는 계급이 아니다. 직업이다. 승려, 관노(官奴) 등 하층민이나 임금을 받고 얼음 일을 하는 서민들도 있었다. 군역에 동원된 사람들이 겨울철을 맞아 얼음 ‘자르는’ 일로 병역을 대신하기도 했다. 빙부는 늘 부족했다. 일이 고되니 한강 변에서 얼음 일을 하던 이들이 다른 지역으로 ‘불법 이주’하는 일도 있었다. 국가, 관청에서는 이런 불법 이주를 강력하게 단속했다.

얼음 자르는 일은 벌빙(伐氷)이다. 12월 초순 무렵, 한강의 얼음이 4촌(12센티 정도) 되면 빙부들은 강으로 간다. 20센티 정도의 얼음이면 상품으로 치고, 더 두꺼운 30㎝쯤 되는 얼음은 보기 힘들었다. 겨울이 춥지 않아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으면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기도 했다.

얼음을 깨고, 자른다. 적절한 크기로 자른 얼음은 빙고로 들어간다. 운반과 창고에 넣는 것도 모두 빙부의 일이다.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는 빙고(氷庫) 혹은 장빙고(藏氷庫)다. 대부분 나무에 이엉을 인 형태인데 돌로 만들면 비교적 견고하다. 석빙고(石氷庫)다.

얼음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가 있다. 조선 중기 문신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의 ‘농암집’에 나오는 ‘얼음 깨는 노래’이다. 얼음 관련 일, 빙부의 일과를 잘 보여준다. 긴 시지만, 전문을 소개한다.

늦겨울 한강에 얼음 꽁꽁 어니/천인만인 우글우글 강 위로 나왔다네/도끼로 쿵쿵 얼음을 찍어 대니/아래로 소리 울려 용궁까지 들리겠네/찍어 낸 얼음 쌓으니 하얀 설산 같고/쌓인 음기는 사람을 엄습하네/매일 아침 얼음 등짐 빙고에 져 나르고/밤이면 밤마다 강바닥으로 얼음 파 들어가네/낮은 짧고 밤은 긴데 밤늦도록 일을 하니/강바닥에는 온통 노동요만 들린다네/정강이 못 가리는 짧은 옷, 걸친 것 없는 발/매서운 강바람에 언 손가락 떨어지네/고대광실 한여름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아리따운 여인 하얀 손 맑은 얼음 내어오네/큰 칼로 얼음 깨서 자리마다 두루 돌리니/맑은 대낮에도 흰 안개 흐른다네/자리에 앉은 이들 한여름 더위를 모르니/그 누가 얼음 뜨는 고생을 알아주겠는가/길가에 더위로 죽은 백성 못 보았던가/강 위에서 얼음 뜨던 바로 그 사람이라네

얼음을 깨고, 자르는 일이 마치 노예 부리듯이 한 일이었을까? 위 김창협의 시에서는 얼음 관련 일이 가장 힘든 일이며 마치 노예처럼 부리면서 얼음을 구했다고 표현했다. 그렇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지만 어차피 궁중, 관청 등에서는 매년 여름 얼음이 필요했다. 노예 노동처럼 관리해서는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년(1624년) 12월 22일의 기사다. 제목이 특이하다. ‘한강 가의 주민들이 서빙고를 불태우다’이다. 이른바 ‘서빙고 방화사건’이다.

한강 가의 주민들이 서빙고(西氷庫)를 불태웠으므로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 적간(摘奸)하였다. 강가의 주민들은 폐조 때부터 얼음 저장하는 고역(雇役)을 기화로 이득을 취하며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어 왔는데, 이제 간사하게 외람한 짓 하는 것을 금단하자, 이득을 놓치게 된 것을 원망하여 밤을 틈타 불을 지른 것이다.

사건은 간단하다. 한강 가 서빙고 주변 사람들이 서빙고에 불을 질러서 태웠다. 궁궐에서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다. 중한 정부 부처는 아니지만, 종 6품 빙고별좌(氷庫別坐)가 책임자다. 일을 관리, 감독하는 감역부장과 빙고를 지키는 벌빙군관(伐氷軍官)도 있었을 것이다. 관리관과 군인이 엄하게 지키는 곳에 인근 민간인이 불을 질렀다.

일은 점점 더 이상하게 전개된다. 국가 공식기관인 얼음 창고에 불을 질렀으면 포도청이나 중앙의 형조 등에서 수사를 해야 한다. “중사(中使)와 사관을 보내서 적간(摘奸)했다”라고 했다. ‘중사’는 내시다. 사관은 국왕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이다. ‘수사관’으로 나선 사람이 내시와 사관이다. ‘적간(摘奸)’은 수사가 아니다. 오늘날의 내사(內査) 정도다. 일의 속사정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얼음 창고에 불을 질렀으면 방화다. 내사가 아니라 엄한 수사를 해야 옳다. 결론은 더 이상하다. 폐조가 등장한다. 폐조는 광해군이다. 강가의 주민들은 광해군 시절, 얼음 저장하는 고역(雇役)을 했다. 고역은 ‘힘든 일’이 아니라 ‘돈 받고 일했다’라는 뜻이다. “이득을 취하며 국고의 곡식을 훔쳐먹었다”라고 했다. 믿지 못할 부분이다. 광해군 시절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나라의 왕 노릇을 했다.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왕족의 사저인, 훗날 덕수궁에서 머물렀다. 대단한 임금을 주었거나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데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인조는, 서빙고, 인근 주민들을 광해군 시절의 ‘적폐’로 여겼을 것이다.

한양 도성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다. 오늘날의 용산구 서빙고동, 성동구 옥수동 부근인 두뭇개[豆毛浦, 두모포] 일대다. 동빙고는 종묘 제사 등에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는 궁중과 각급 기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8배쯤 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개인적으로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도 있었다. 사빙고(私氷庫)다. 조선 시대 전에도 사빙고는 있었다. ‘고려사절요’ 고종 30년(1243년) 12월의 기록이다.

(전략) 12월에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私伐氷藏之, 사벌빙장지]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후략)

최이(崔怡, ?~1249년)는 고려 무신 최충헌의 아들이다. 원래 이름은 최우, 당대의 실세였다. 최이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서 자신의 빙고를 채웠다. 조선 후기 사빙고는 성격이 다르다. 개인 사유의 빙고다. ‘사설 얼음 창고’이다. 업자들이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얼음을 판다. 주로 생선 보관 등에 사용했다. 국가에서도 사빙고를 이용했다.

순조 8년(1808년), 서영보(1759~1818년), 심상규(1766~1838년) 등이 편찬한 ‘만기요람’에는, “영조대왕 당시, 부역으로 궁중에 바치는 얼음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민간의 얼음을 사게 했다. 당시 1년간 필요한 얼음이 4만 여 정이고 백성들의 부역을 통하여 구하는 얼음이 3만 여 정이었다. 나머지는 사빙고에서 사들인 것이었다”라고 했다.

동, 서빙고나 한강 변 등에 있는 빙고는 외빙고(外氷庫)다. 얼음은 쉬 녹는다. 바깥에서 궁궐 안으로 얼음을 가져오면 궁궐 안의 ‘내빙고(內氷庫)’에 보관했다.

지방에도 빙고가 있었다.

경북 안동의 ‘안동석빙고제’는 2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지방에도 빙고, 석빙고가 있었고 벌빙(伐氷), 얼음을 옮기는 일, 장빙(藏氷)의 일을 모두 해냈다. ‘경북매일’ 2004년 1월 28일의 기사다.

조선 시대 장빙제 재연식이 30일 안동시 남후면 암산보트장과 안동댐 석빙고에서 재연된다./올해 3번째 열리는 안동 석빙고제는 (중략)/안동시 성곡동 안동댐 석빙고는 보물 제305호로 조선 영조 때 겨울철에 낙동강에서 잡아 올린 은어를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하기 위해 돌로 만든 얼음 저장고이다./이번에 재현하는 장빙제는 낙동강에서 얼음을 채빙하는 모습과 채빙된 얼음을 석빙고에 장빙하는 과거의 모습을 재연하고 장빙행사에 (중략) 과거 채빙 당시 모습이 그대로 재연된다.

‘지방의 얼음’은 향교의 제사(봉제사), 관청의 손님맞이(접빈객) 등에 사용했다. 현지의 현직 관리, 퇴직 관리들에게도 내주었다. ‘영조 은어 진상’은 오해가 있다. 궁중으로 올라가는 세금, 공물용 생선은 건어물이 원칙이다. 냉장 상태로 한양 도성에 은어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달 이상 상하지 않는 냉장은 없다. 지방 빙고의 용도는 ‘한양 진상’이 아니라 현지 ‘봉제사 접빈객’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지방의 석빙고는 안동 석빙고(안동시 민속촌길 13 박은숙초가), 경주 석빙고(경주시 인왕동 449-1), 청도 석빙고(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285), 현풍 석빙고(대구 달성 현풍읍 상리1길 36), 창녕 석빙고(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영산 석빙고(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 등이다. 목빙고(木氷庫)가 아니라 석빙고이기 때문에 남았을 것이다. 더하여 이 지역은 유교 전통이 강한 곳이다. 역시 향교 제사가 큰 목적이다.

한반도의 얼음 창고는 신라 지증왕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년)은 ‘동사강목’에서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3대 왕인 유리왕(?~57년) 때 이미 장빙고를 만들었다고 하나,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설’을 믿는다”라고 했다.

귀한 얼음은 귀하게 사용했다. 중앙에서는 궁궐 내부와 각 부처, 관리들에게 얼음을 나눠 주었고, 전옥서(典獄署)에서 옥살이하는 죄인들에게도 일정량의 얼음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얼음을 나누어 주는 ‘반빙(頒氷)’이다.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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