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겨울 산에서 조난을 당합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탈진하기 직전 멀리 불빛을 발견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기어갑니다. 눈을 떠 보니 따스한 방안. 약초 캐는 할머니가 말합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시우? 이 지독한 눈보라는 3∼4일은 걸릴게요. 그 사이 몸을 잘 회복하시구려.”

할머니는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내놓습니다. 눈보라가 잦아들고 체력을 회복한 남자는 봉투에 정성껏 편지를 써서 감사를 표시하고 수표 한 장을 담아 할머니 방 한쪽 구석에 놓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수표는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지요. 남자는 거부(巨富)였습니다.

1년 후 다시 겨울. 남자는 할머니가 새집을 짓고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 산골을 다시 찾아갑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본 남자는 숨이 막힙니다. 할머니가 숨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방을 둘러보다 깜짝 놀랍니다. 창호지 구멍 난 곳을 때우는 문풍지로 수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소개한 이야기는 ‘할머니와 수표’라는 이야기가 약간 다른 버전으로 퍼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 이야기는 아닐까요? 고전에 숨겨 있는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논어 페이지마다 1억 원 수표가 끼워져 있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플라톤 대화편 한 페이지마다 5천만 원짜리 수표가 보인다면 허황된 말일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전 페이지마다 숨겨져 있는 수표를 어떻게 하면 현찰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고전을 읽어 유능하고 돈 잘 벌고 높은 자리를 꿰차는 것이면 곤란합니다. 그들이 일구어 가는 사회는 향기롭지 않습니다. 뉴스만 봐도 악취가 진동합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석학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들이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기꺼이 자진해 참전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집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지성을 갖고 있기에 존경을 받는 것이지요.

고전에 가득 넘치는 수표 다발을 현찰로 바꾸는 비밀번호는 두 글자입니다. ‘사랑’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 약자를 보살피는 사랑. 나와 내 가족을 챙기는 이기적인 울타리를 부수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사랑’을 몸소 행하는 용기를 보일 때 비로소 고전의 지혜는 방긋 웃으며 우리에게 그 힘을 나눠 주고 우리를 저 먹구름 너머의 눈부신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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