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②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된 임신서기석(보물 제1411호)의 복제품. 약 30cm 길이의 비석에 두 명의 인물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이다.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된 임신서기석(보물 제1411호)의 복제품. 약 30cm 길이의 비석에 두 명의 인물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이다.

경주시 석장동에 자리한 화랑마을을 찾아가던 날. 도시의 아스팔트와 지붕을 적시던 세찬 소나기가 그치고 올여름 첫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세련된 기와가 인상적인 화랑마을. 그곳 전시장에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보물 제1411호)’을 만났다.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오늘날의 문장으로 쉽게 풀어 쓰면 아래와 같다.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 된 보물 ‘임신서기석’
길이 30㎝ 돌에 일흔네 자 글씨 새겨진 비석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 라는 역사학자
유교·도교·불교 융합적 조화로 신라 발전 기여

“임신년 6월 16일 우리 둘은 더불어 맹세하며 여기에 기록한다. 앞으로 3년 이후에도 충성스런 도리를 가슴에 새겨 이를 지키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가 이 다짐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크게 불안해진다고 해도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지난날 약속했듯 다양한 책을 읽어 학업에도 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

신라시대 청년들의 유교적 도덕성과 그 실천의지를 담아낸 ‘임신서기석’은 서두에 적힌 ‘임신(壬申)’이란 글자로 미루어 볼 때 임신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렇기에 신라 진흥왕 시절인 552년, 또는 진평왕 때인 612년, 혹은 성덕왕 재위 기간인 732년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내구성이 강한 돌은 변치 않을 의지와 숭배의 마음을 담기에 좋은 재료였다. 세계관의 중심이 신(神)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기 전인 르네상스(Renaissance) 이전 시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돌을 깎아 성당을 만들었다. 불멸한다고 믿는 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보여주기에 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

1천 년 전 캄보디아에선 크메르(Khmer) 왕조의 사원과 궁전을 미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건축물들의 재료 또한 돌이었다. 수백km 거리에서 코끼리 수천 마리를 동원해 실어온 돌로 만든 석조건물은 자야바르만, 수리야바르만 등으로 불렸던 왕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경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인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청년 지도자였던 화랑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비전을 가지고 생활한 것인지를 추측하게 해주는 귀한 사료(史料)”라고.

◆ ‘풍류도’와 ‘임신서기석’은 어떤 관계가?

다수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그간의 성과물들을 종합하면 화랑은 20세 이전의 신라 청년들이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겨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좀 더 범주를 넓힌다고 해도 대학교 1학년이나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또래다. 소년에 가까운 이들이 어떤 이념과 규범에 의해 교육받았기에 ‘임신서기석’에 쓰인 문구를 쓸 만큼 조숙할 수 있었을까? 의문과 다소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학자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다. 절친한 두 명의 화랑이 자신들의 맹세와 다짐을 뜨거운 불과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도 온전히 없앨 수 없는 돌에 명명백백(明明白白) 새겨 스스로를 다잡고자 만든 ‘임신서기석’.

여기에는 둘을 매료시켰던 ‘풍류도’의 향기와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풍류도’가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다.

난랑(鸞郞)이란 이름을 가진 화랑을 기려 만든 비석을 해석한 ‘난랑비서’에서 유(儒)·불(佛)·선(仙) 통합주의자 최치원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다소 길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해 현대적으로 해석된 문장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인용한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삼교(三敎)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主旨)와 같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 도교, 불교를 효과적으로 융합하고 충돌 없이 조화시킨 ‘풍류도’가 바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화랑들의 정신적 지향점이 된 ‘현묘한 도(玄妙之道)’라는 것.

‘임신서기석’에 자신들의 향후 목표와 언약을 담아낸 청년들은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풍류도(풍류정신), 혹은 풍월도의 가르침에 근거해 비문(碑文)을 새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경주 화랑마을의 임신서기석 전시관의 모습.
경주 화랑마을의 임신서기석 전시관의 모습.

◆ ‘풍류도’란 단어가 생겨난 근원은…

이처럼 신라사회와 그 사회를 주도했던 청년들의 조직 화랑도(花郞徒)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풍류도(풍월도)의 어원(語源을 찾아보는 작업은 의미가 작지 않을 터.

철학자 한흥섭의 논문 ‘풍류도의 어원’은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치우침 없이 두루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흥섭은 풍류도를 “고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사상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며, “한국 철학사에서 풍류도의 위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유교, 불교, 도교와 비교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자료의 숫자가 적고, 신빙성 여부의 판단이 어려우며, 논리 전개에서의 객관적인 설득력 결여가 풍류도를 하나의 체계를 갖춘 학문적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풍류도의 어원’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풍류도의 본질과 뿌리를 찾아보자는 한흥섭이란 학자의 열정에서 출발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해본다. 그는 위에 언급된 논문에서 최남선(1890~1957), 안호상(1902~1999), 양주동(1903~1977)이 각기 주장한 풍류도의 어원과 그 의미에 관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 최남선 “풍류와 풍월의 어원은 부루”

육당 최남선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다. 한흥섭에 따르면 최남선은 풍류도의 어원을 ‘부루’에서 찾고 있다.

‘부루’란 예부터 존재한 고유 신앙이며, 그 신앙의 요지는 ‘하늘의 도(天道)’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최남선의 주장. 더불어 최남선은 이 신앙이 유교와 불교에 앞서 있고, 유교·불교가 유입된 후에도 함께 존립했다고 봤다. 그렇다면 육당이 풍류도의 어원이라 칭한 ‘부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일까? 최남선의 저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부루는 ‘밝의 뉘’가 이리저리 변하여 달라진 말이다. 대개 ‘밝’은 광명과 신(神)이요, ‘뉘’는 세계이니 ‘밝의 뉘’라 함은 광명세계, 곧 신의 뜻대로 하는 세상이란 의미다. 훗날 ‘밝의 뉘’란 말이 여러 가지로 변하고 또 이것을 한문으로 이리저리 쓰는 가운데 그 종교적 진면목이 일정 부분 가려지게 되었지만, 그 고갱이(핵심)는 꾸준하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위의 인용을 볼 때 최남선은 ‘풍류도’를 한국의 고대 신앙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종교적 지향점이 ‘하늘의 도가 실현되는 밝은 세상’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한흥섭은 이 논지(論旨)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육당이 말한 바 ‘부루’ 즉 풍류도의 골자는 ‘홍익인간’이고, 주장의 연원은 ‘단군사화’라고 추정했다.

◆ 안호상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이 풍류도”

양주동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

한흥섭에 의하면 사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은 “기본적으로 배달교(단군교)에 근거한 주체적 민족주의자”다. 그렇기에 단군의 가르침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정통적 철학과 사상으로 믿었고, 그것을 배달길(風流道 또는, 화랑도)로 표현했다. 안호상이 정의하는 풍류도(풍월도)는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아래 인용을 보자.

“배달길을 풍월도라, 또 배달교를 풍류교(風流敎)라 번역한 것은 순전히 우리말의 음을 따라 이두문으로 적은 것이다. 풍월도의 풍(風)이 옛날엔 발함 풍자요, 또 바람을 배람이라고도 했다.

또 풍월도의 월(月)은 달 월자다. 이들 ‘발’과 ‘배’와 ‘달’을 합쳐보면 풍월도는 ‘배달길’이란 말이다. 또한 풍류도의 류(流)는 흐를 류자인 동시에 달아날 류자임으로 풍류도 역시 ‘발달길’이 된다.”

안호상은 신에 대한 숭배, 조상 공경, 인간 사랑이라는 배달교의 3가지 덕목이 풍류사상의 핵심 내용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논문 ‘풍류도의 어원’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것은 ‘전설적 국문학자’ 양주동의 풍류도 관련 주장이다. 양주동은 사뇌가(詞腦歌·향가)의 해석 과정에서 풍류도와 풍월도가 우리나라 고대(古代) 종교사상인 ‘ㅂ道’를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글자라고 말한다. 즉,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ㅂ’과 ‘ㅂ道’는 뭘 의미하는 걸까? 이에 관해 한흥섭은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양주동의 글자 풀이에 의하면 ‘ㅂ’은 광명(光明)이나 국토(國土)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ㅂ道’ 즉 풍류도는 ‘광명도’나 ‘국토도’가 되고, 이는 곧 태양 숭배나 자연 숭배 사상임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은 최남선이 말한 광명계의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적 종교사상과도 일치한다.”

광명세계로 가고자 하는 의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자연을 대하는 겸양한 태도…. 기자가 판단하기에 풍류도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집합체로 보인다. ‘임신서기석’을 뒤로 하고 화랑마을을 내려오는 길. ‘풍류도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홍안(紅顔)의 청년들이 떠올랐고, 문득 1천300년 전 두 화랑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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