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기에,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라는 용비어천가가 구가했던 조선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시구가 담고 있는 깊은 통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리 경제의 전체 모습을 수풀이 무성한 삼림으로 비유해보면 숲속에서 생장하는 나무들 가운데 뿌리 깊은 나무는 과연 얼마나 될까. 1998년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 수백에서 수 천 퍼센트에 이르는 과도한 부채비율을 가지면서도 외형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대마불사’를 맹신하며 오만이 극에 달하였던 기업집단들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업을 나무로 비유할 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인 기술개발, 인재 육성, 재무건전성을 튼튼하게 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외형적인 모습인 이파리에 해당하는 멋진 사옥을 건설하거나 손쉬운 광합성을 위해 가지를 쉽게 뻗기 위해 정관계와의 로비에만 신경을 쓰던 기업들은 외환위기라는 비바람에 손쉽게 뿌리째 뽑히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라 경제 숲의 큰 나무인 대기업들 가운데 과연 가뭄에도 견디고, 태풍에도 끄떡없는 깊은 뿌리를 지닌 곳은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게다가 제조 대기업인 경우라면 더욱 많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기업의 우선 가치가 수익극대화이고 가장 좋은 달성 수단이 원가절감이기 때문이다. 직접 소재·부품을 생산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조달하는 것이 손쉽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면 굳이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들여 개발할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소재·부품을 중소기업들과 협업하여 직접 개발하면 나라경제인 숲이 매우 무성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자기만 햇볕을 쉽게 받고 손쉽게 물가를 차지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고용직 최고경영자들이라면 주주나 재벌일가에게 성과를 보여야만 연임도 가능할 것이기에 자신의 임기동안 굳이 장기적으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자하여 핵심 소재부품을 개발, 생산하려는 프로젝트는 그 중요성을 알더라도 외면하고 당장의 성과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먼저 이익을 내는 방안들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핵심 소재 내지는 원자재 수출을 제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수십 년간 학계나 정부에서 수입원자재 다변화, 수입대체산업 육성, 소재부품 연구투자 강화 등을 부르짖었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점차 세계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희토류, 석유, 식량 등은 국가차원에서 이미 국가안보수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자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오랫동안 휘두르고 싶었던 칼을 이번에 한번 뽑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그동안 자사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인재육성이나 연구개발투자보다는 외적 디자인이나 주요 기능개선 등을 통한 매출 확대로 이익창출을 이끌었던 기업들이 뿌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수출제한이 확대되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앞으로 국내에서 폴더형 핸드폰을 구입하지 못하거나,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수동으로 접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 기업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영원히 수출제한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세계경제가 어려운 지금이라면 한국을 제외한 여타 시장에 대한 수출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 한번 휘두른 칼은 앞으로는 수시로 뽑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일본산 소재부품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최대한 조기에 낮추지 않는 한 한국 경제 숲에 뿌려지는 일본산 씨앗이나 비료가 언제든지 우리 나무의 뿌리를 고사시킬 수 있는 독약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