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

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 집에는 근처 사는 일가가 모여 휴일식사를 마친 후 이야기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단란함도 잠시, 예고 없이 찾아온 응급 상황에 온 집이 발칵 뒤집혔다. 뇌혈관 수술 이력이 있는 이종사촌이 좀 체한 것 같다며 부산을 떠는가 싶더니 갑자기 쓰러져버린 것이다. 구급차에는 이모를 대신해 직전 전조증세부터 계속 지켜본 내가 동승하기로 했다.

평소 위기에 잘 무너지지 않는 강한 ‘멘탈’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는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환자의 상태와 쓰러지기 전 상황, 처음 증세가 시작된 후 개략적인 시간, 환자의 병력과 수술 시기, 최근 담당의사 진료 시점까지 찬찬히 설명하며, 이동 중 구급요원들의 처치를 도왔다. 그러나 나의 ‘강철 멘탈’과 인내심은 응급실에 도착한 직후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응급실에서 보호자는 제 정신이 아니다. 접수를 하려는데, 환자의 주민번호는커녕 생년월일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렇게 친절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접수를 마치고 들어가자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알아본 구급요원이 나를 사촌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환자는 응급실 내 깊숙이 자리한 ‘소생실’ 안에 누워 있었다. ‘소생’이라는 단어와 삽관까지 한 모습을 본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었지만 응급실 의료진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됐다. 지금 되짚어보니 응급환자의 보호자는 처음 119에 전화할 때부터, 구급요원들, 응급실 접수 담당자, 그리고 응급실 내 의료진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기도 끔찍한 그 상황을 곱씹으며 적어도 네다섯 차례 혹은 그 이상 설명을 되풀이해야 한다. 경황 중에도 나름 침착하게 같은 얘기를 네 번 다섯 번 반복해서 설명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내 인내심은 ‘쓰러진 시간이 정확히 몇 시 몇 분이냐’는 당직의사의 질문 앞에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선생님, 가족이 쓰러져서 경황없는 마당에 어떻게 시분까지 정확히 기억하지요?”

다행히 환자는 며칠 입원 후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가족들에게 그날의 일은 트라우마가 아닌 하나의 해프닝으로 기억됐다. 그제야 고군분투하는 의사선생 앞에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혼자 삼킨 내 그 다음 말이 떠올랐다. ‘집안에 무슨 블랙박스라도 설치해 뒀어야 하나요? 내가 무슨 인공지능 로봇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스마트폰과 우리집 홈 스피커 속 인공지능 ‘그녀’들은 그 순간 뭘 하고 있었을까? 평소에는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TV채널을 바꿔주겠다며 주인 비위를 맞추려하고, 간혹 가족들의 대화중에 자기를 부르는 줄 착각해 불쑥 나서 성가시기까지 한, ‘빅**’, ‘시*’, ‘지*’, ‘아*’라는 이름의 그녀들 말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기대주 인공지능은 정작 주인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바로 그 순간에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작년 MIT에서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의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이름을 딴 ‘노먼’ 이야기다. 노먼은 잘못된 정보를 흡수한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태어난 실험적 존재였다. 인공지능에게 어두운 데이터만 가르쳤더니 심리검사에서 ‘죽음·살인’만 떠올리고 반사회적 성향을 보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지켜보며 듣고 있었을 터인데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침묵을 지킨 인공지능 그녀들의 모습은 얼핏 그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을 연상케 한다.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이 탄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인간다운 행동요령과 기술을 열심히 가르쳐 주어 미래를 함께해도 좋을만한 제대로 된 파트너로 키워내어야 한다. 1인 가구 비율이 30%에 육박하는 지금, 어쩌면 그 인공지능이 쓰러진 환자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