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디와 데카당스에 대해
댄디와 데카당스에 대해
  • 등록일 2019.06.19 20:16
  • 게재일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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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길’(1689)

영어의 댄디(dandy)는 ‘멋쟁이’를 뜻하며 댄디즘(dandyism)은 ‘멋쟁이 취미’를 뜻한다. 하지만 이들은 천박한 멋쟁이가 아니라 속물주의를 배격하며 정신적 귀족주의를 자칭하는 ‘진짜’ 멋쟁이를 일컫는다. 이러한 멋쟁이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많이 살고 있는데, 과거에는 조금 심했던 것 같다. 그들은 얼마나 멋쟁이였을까? 이를 위해서라면 댄디에 대한 묘사를 한 번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다.

“귀금속 세공사 르콩트가 세공했다는 발작의 지팡이는 신화가 되었다. 끝이 금으로 된 그의 등나무 지팡이 끝에는 수많은 터키석이 박혀 있고 중앙의 작은 구멍 안에는 한스카 부인의 초상화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들어있다. 당시 발작은 이 지팡이 값으로 700프랑 가까이 되는 돈을 세공사에게 지불해야 했는데, 그 값어치는 파시 거리에 있던 그의 집 일 년 치 집세 만큼이었다고 한다. 댄디에게 있어 지팡이가 대변하는 소품이 단순한 과시 이상의 대상, 즉 숭배의 대상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구별’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초상화가 조반니 볼디니가 그린 몽테스키외의 초상을 보면 된다. 댄디 스타일의 가장 완벽한 이미지로 평가받는 그의 초상화에는 고전적인 절제미와 우아함, 19세기 후반의 현대성이 동시에 반영되어 있다. 갈색과 회색이라는 동색 계열의 양복은 모델의 섬세함을 나타내지만, 무심한 듯한 얼굴과 지팡이를 든 거만한 몸짓은 특권층의 그것에서처럼 거리감을 만든다. 한편으로는 드러내고 한편으로는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진실을 숨기고자 하는 댄디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어쩌면 댄디가 그토록 원했던 구별의 욕망은 실상 숨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몽테스키외의 초상에 영감을 받은 마르셀 프루스트는 후에 샤를뤼 남작이라는 인물을 창조하기도 했다.” (조은라, ‘댄디즘 - 이념과 형식의 철학’,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1>,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2.8, 420~421).

그런데 이러한 댄디는 퇴폐를 뜻하는 데카당스와 함께 연계되어 불린다. 댄디는 데카당스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데카당스란 파손, 폐허, 부패, 더 분명하게는 퇴행적 현상이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 단어들은 어쩌다 짝패가 된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근대성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성은 낭만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낭만주의는 목가적이며 전원적이다.

이와 달리 모더니티는 도시적 감수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농업중심의 경제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면 근대성은 도시성과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도시적 속성의 핵심에는 벤야민이 언급한 바와 같이 속도와 이러한 속도가 만들어내는 촉각적이며 즉각적인 반응이 놓여 있다.

대중들은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더 빨리 소비하고, 그 소비가 효력을 잃기 전에 또 다시 소비한다. 소비의 속도를 만드는 주체는 대중이 아니라 상품이다. 오히려 상품이 소비의 속도를 부추긴다. 상품은 망치로 내려치는 충격과 같은 직접성을 가지며, 대중은 그러한 상품 앞에서 이성과 합리성을 마비당한 채 계속해서 소비한다. 근대는 이성과 합리를 요구하지만, 근대적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충동적 소비를 강요한다. 근대적 군중은 근대적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의 시장을 휩쓸면서 동시에 스스로 휩쓸린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생산력과 제품의 질적 향상을 진보라고 부른다. 이러한 진보의 끝에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광고한다. 하지만 그 끝은 영원히 걸어도 닿을 수 없는 소실점과도 같다.

‘미델하르니스의 길’에서처럼 하나로 모여지는 점 따위는 멀리서 관조할 때만 나타난다.

직접 그 길에서 걸으면 소실점은 항상 소실점으로만 나타날뿐 결코 하나의 점으로 모아지는 곳은 없다. 무한함수처럼 언젠가 어떤 수로 수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늘어놓아도 수렴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진보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그 속도만큼 뒤로 물러날 뿐 그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다. 늘 그만큼의 점만으로 존재한다. 그러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속도며 그러한 속도를 기반으로 한 진보다.

데카당스와 댄디즘은 이러한 근대적 진보에 저항한다. 데카당스를 이루고 있는 수다한 의미 중 퇴행성은 퇴폐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일 것이다. 퇴폐는 근대적 진보에 저항하며 그 자리에서 썩어가고자 한다. 이 퇴행은 근대의 진보적 정신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러한 정신 전체를 파괴하고 폐기시킨다.

댄디즘은 이러한 데카당스와 공모한다. 댄디즘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대량생산에 반대한다. 대량생산에 반대한다는 것은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수치화나 표준화를 반대한다.

예컨대 로베르 드 몽테스키외 백작(Robert de Montesquiou·1855∼1921)은 슈트와 그가 낀 장갑과 오른손에 든 지팡이까지도 결코 대량생산 될 수 없는 수공예품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

그램 질로크는 댄디로서의 산책자를 언급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이 산책자의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적확한 지적이긴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램 질로크는 댄디를 영웅주의에서 기인하는 자기과시 정도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댄디를 “단지 속이 빈 저항”을 일삼는 게으름뱅이, “영웅이면서 영웅주의를 연기”하는 사기꾼 정도로 단정짓는다. 그러면서도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게으른 몽상가이기에 현대성의 참된 영웅”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결론으로 논의를 마무리짓고 있다(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304∼311면).

그런데 왜 댄디가 ‘영웅적 성격’의 소유자인 것일까. 벤야민은 댄디가 가진 낭만성을 완전히 제거한 자리에서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무용의 가치’ 즉 ‘전시가치’를 발견해 내고 있다. 자본은 노동을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러한 효율성의 결과로 성립되는 것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다.

하지만 전시가치는 오로지 스스로를 과시할 뿐이다. 댄디는 아케이드를 런 어웨이처럼 오가며 자신을 과시한다. 그러한 전시는 결코 자본이나 전시로 환원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자본주의 스스로를 붕괴시킬 수 있는 균열지점이다.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이 장치가 포획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자본주의적인 목적으로부터 떼어내 헛돌게 만드는 일이며, 그리하여 새로운 가치를 열어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세속화 예찬, 134면).

댄디는 돈의 경제적 쓰임과도 무관하게 사치하며 게으름뱅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대적 자본이 추구하는 이윤, 축적, 소유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오로지 돈의 사용 자체에 몰입한다. 댄디는 비효율적 생산, 이윤 없는 소비를 일삼으며 생산과 소비, 이윤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핵심적 두 축을 무력화시킨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것은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진 가능성이 아닌 텅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오직 잠재태로 존재하며 그 잠재태의 가능성은 과거의 흘러간 이미지 속에 담긴 미래의 흔적을 발견하는 현재(지금-여기)의 임무다.

현재는 규정될 수 없고, 관조될 수 없으므로 잠재적인 것은 늘 잠재적인 것으로 남는다. 댄디은 근대를 과거로 되돌리지 않는다. 다만 근대적 속도를 무화시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을 느낀 근대성은 데카당스와 댄디를 인신공격하여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추방시킨다. 하지만 추방될 리 없다.

왜냐하면 데카당스와 댄디는 근대성과 함께 태동한 것이지 근대성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댄디와 데카당스는 근대적 정신과 더불어 언제든 균열과 전복의 지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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