홑눈과 겹눈
홑눈과 겹눈
  • 등록일 2019.06.19 20:16
  • 게재일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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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귀연수필가
송귀연수필가

대낮인데도 다람쥐쳇바퀴 돌듯 몇 번씩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매번 딸네 집을 찾을 때마다 길눈도장 확실히 찍어둬야지 하지만 생각은 그때 뿐, 또 이 모양새다. 홑눈의 길치가 가진 치명적 약점이다.

잠자리는 겹눈에 육각형처럼 생긴 수만 개의 낱눈이 붙어 있다. 이 낱눈들이 렌즈 역할을 하여 360도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 어릴 적, 울타리 끝에 앉은 잠자리를 잡으려고 숨죽이며 다가갔지만 매번 놓치고 만 것도 그 때문이다. 나비의 겹눈은 넓은 범위를 보기 때문에 예쁜 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색깔구분이 가능한 겹눈은 어떤 사안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데 유효하다 하겠다.

어릴 적 엄마는 사물에 대한 시계가 단순했던 것 같다. 슈퍼우먼 같은 엄마였지만 한 가지 못마땅한 게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원하는 일이라 해도 당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끝까지 반대했다. 특히 남존여비로 굳어진 교육관은 딸들의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와는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 여파로 아들 셋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딸들은 평생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안고 살아야 했다.

집안의 큰일이나 제사 때면 꼼꼼하게 처리하느라 일이 끝날 즈음이면 아예 파김치가 돼 버린다. 쇼핑을 할 때도 찬찬히 살피지 못하고 대체로 한 가지 디자인에 꽂히기 일쑤이다. 성질이 급한 탓도 있겠지만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옷장엔 판박이처럼 비슷한 옷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어느새 단편적인 엄마를 대물림하고 있었다.

원시시대엔 남자는 사냥을, 여자는 집안에서 요리를 했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 가족의 식량을 구해야 하는 남자는 당연히 시야가 넓어야 했고 고도의 종합적 판단을 필요로 했다. 반면 여자는 집안에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시계가 좁아졌다. 자연스럽게 사고가 단편적으로 굳어졌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성적이기보다 오래된 생활환경의 영향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젊은 날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했다. 남편과 자식이 남보다 앞서길 바랐으며 부와 명예마저 거머쥐고 싶어 했다. 수천수만 개의 낱눈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은 가지려하면 저만치 달아났고 나는 또 그걸 허겁지겁 좇아갔다. 욕망의 겹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조선시대 화가인 최북은 사물에 대한 경도(傾倒)를 경계하여 자신의 한쪽 눈을 송곳으로 찔러버렸다.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림 한가지만으로 일생을 살고자 했던 때문이었다. 샤갈의 그림은 노후로 갈수록 유아적이 되었고 사물을 단순화시켰다. ‘크게 교묘(巧妙)한 것은 서툰 것과 같다’는 말로 졸미(拙美)를 추구한 추사 역시 한 가지 정신세계에 집중한 인물이다. 이들이 세상의 권력이나 부를 지향하였다면 이와 같은 시대적인물의 탄생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복잡했던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에 들어와 소욕지족(所欲知足)의 삶을 산지도 어언 수년째이다. 식료품을 구하는 일부터 사람을 만나는 일까지 모든 것이 불편한 시골생활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불편함에 익숙해졌다. 복잡하기만 했던 수많은 낱눈 같은 것들을 하나 둘 버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별을 관측하는 허블망원경은 천체를 정밀하게 보여준다. 초점을 단순화 또는 집중하는 원리로 먼 곳을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홑눈을 가진 거미는 동물처럼 정확한 상을 맺지는 않지만 세밀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능력은 훨씬 뛰어나다. 모든 것을 다 보리라는 욕망을 버리고 단 하나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어쩔 수 없이 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만 매번 왜 그러우?” 핀잔의 목소리가 휴대폰 저쪽에서 들려온다. 어쩌랴! 홑눈의 유전자를 가졌는데. 아파트 단지 위로 키클롭스의 눈 같은 해가 선명하게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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