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공부 싫어하는 대학생을 위해 장자 ‘내편(內篇)’의 ‘양생주 (養生主)’ 첫머리를 인용한다. “우리 인생은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따름은 위태롭다. 그럼에도 앎을 추구함은 더욱 위태로울 따름이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한계와 무의미를 지적한 대목이다. 태상노군(太上老君)과 달리 장주(莊周)가 백성의 무지를 주장하지 않은 사상가라는 점에서 이 구절은 낯설게 다가온다.

끝없는 살육과 전쟁 그리고 백성의 피폐한 삶의 근원을 장주는 지식인의 탐욕에서 본다. 각종 방편과 책략을 가지고 제왕들에게 유세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부박(浮薄)한 자들의 아수라판 전국시대. 전국 7웅이 투기장의 투사들처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던 암울한 투쟁의 시대. 그 시대에는 부국강병을 설파하는 지식인 무리 제자백가가 포진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부국강병의 요체는 제도(帝道)나 왕도(王道)가 아니라 패도(覇道)였다. 요순시대의 태곳적 평화와 안빈낙도(安貧樂道)나 격양가(擊壤歌)의 방도가 아니라, 타방(他邦)의 궤멸을 전제로 아방(我邦)의 번영을 주장하는 투쟁이 패도다. 나라 곳간을 풍족하게 하고, 강성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 즉시 출병하여 이웃 나라를 병탄하는 전쟁에 돌입하는 부국강병. 그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평민계층, 즉 백성이었다.

백성이 고종명(考終命) 하려면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전쟁이 없으려면 글줄깨나 읽은 지식인 집단의 선동과 책략이 사라져야 한다. 여기서 발원하는 것이 앎의 무한지평과 인생의 유한성 인식이다. 지식의 세계는 난바다처럼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하되 몇 줌 안 되는 앎으로 혹세무민하는 식자(識者)들에게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을 날린 장자.

장주가 이런 결론을 내린 데에는 사기열전의 ‘상앙’ 같은 인물의 인생역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나라 효공(孝公)이 천하인재를 등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변법(變法)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간하여 권력을 장악한 상앙.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취약했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으로 일약 강성대국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효공의 죽음과 함께 갑작스레 상앙을 찾아오는 ‘법가(法家)’의 몰인정과 비인정(非人情)의 결과는 거열형으로 종결된다.

숱한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도 능지처참으로 막을 내린 가혹한 드라마. 모든 것의 시발점은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의 욕망과 약소국 군주의 정치적 야망이었다.

그들의 의기투합이 거대제국 진나라의 초석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 상앙과 대진제국 사이참에 저잣거리에서 은둔했던 장주는 행복과 평안의 요체로 지식의 폐절, 지혜의 유폐를 주장한 것이다. 장주 자신도 ‘예미도중(曳尾塗中)’ 고사처럼 평생 출사하지 않는다.

도보(徒步)로 세상사가 알려졌던 고대의 시간대와 광속으로 지구촌 일상이 전해지는 21세기는 질적으로 판이하다. 차고 넘치는 지식과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갈피를 잡기도 버겁다. 욕망과 목표가 갈등과 파국을 낳고, 그것은 언어폭력과 막말의 무한반복을 잉태한다. 거기서 정치혐오와 정치인 기피증이 만들어진다. 반갑고 푸근한 소식은 끝내 찾기 어렵고, 처절한 절규와 투쟁의 저열한 목소리만 높아간다.

이러매 조용히 눈 감고 생각해 볼밖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선지자들이 온 곳을 모르고, 그들이 간 곳 또한 알지 못한다. 언젠가 우리도 그리로 떠나야 한다. 이런 자명한 이치를 눈감아버리고 오늘도 헛헛한 투쟁으로 허우적댄다.

잠시 눈감아보자. 나의 지금과 여기,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을 돌이키자. 그리고 깊게 숨 쉬어보자. 21세기 양생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