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우리가 흔히 연해주(沿海州)라고 부르는 곳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Primorskii)지역이다.

연해주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에 접하고 중국과는 방천에서부터 맞붙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1863년부터 이 지역으로 13가구가 처음으로 이주하였다.

하산에서 가까운 지신허(地新墟)가 함경도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마을이다. 일제의 침탈 전후 애국지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이곳에서 달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곳이다.

남북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시절 필자는 이곳을 자주 찾은 적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동북 쪽 아르촘에는 진기한 체육대회가 열렸다. 러시아, 중국, 한반도 남북으로 흩어져 살았던 우리 한민족이 친선 체육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북한의 일용 노동자, 남한의 현지 회사원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남북한 영사도 참여하였지만 손은 잡지 않고 눈인사만 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두 영사가 손을 마주 잡도록 하여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사진을 찍게 하였다. 그 화합의 상징인 사진이 필자가 가장 아끼는 귀중한 사진 한 장이 되었다.

오는 6월 말 독립운동계승사업회는 임정 100주년 기념으로 연해주 일대를 다시 탐방하려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임시 정부하면 상해임정만 떠올리고 연해주의 항일 활동을 잊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의 상해 통합 임정은 연해주의 항일 운동이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해 임정은 문창범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한 대한국민의회가 참여한 결과이다. 우리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크라스키노 일대의 애국 선혈들의 족적을 다시 찾는 것은 독립운동사의 대의를 살리기 위함이다. 과거 구소련과 국교마저 수립되지 못해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족적을 찾기는 무척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990년 9월 러시아와 정식 국교가 체결됨으로써 이곳 항일 투쟁의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무척 다행한 일이다.

과거에 비해 우리 선조들의 연해주 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는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유인석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인 13도의 군이 편성된 곳이 이곳 연해주이다.

홍범도, 이상설은 이곳에서 군사조직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 바친 분들이다. 일제하에서도 이곳 조선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고 성명회와 권업회 등을 통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안중근의사가 동지 11명과 단지 동맹을 결성한 곳도 이곳의 크라스키노이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전로 한민족 중앙회가 조직되고 그것이 연해주 임정인 대한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이곳에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순절한 사람도 수없이 많다. 조국의 해방이 되지 않으면 이곳 사이펀 강에 유해를 뿌려 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라진 이상설 선생, 강가의 그의 유허비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일찍이 함경도 고향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재력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재형 선생도 이곳에서 순절하였다.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도 이곳 우수리스크가 그의 활동 무대였지만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상해 임정의 군무총장을 지낸 이동휘 선생도 시베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수리스크의 고려문화센터는 이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우리 학계가 연해주 항일 운동에 관한 역사를 보완하고 재평가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