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축조돼 1천500여 년 가까이 자리를 지킨 첨성대. 수차례 나라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월성 일대의 많은 문물이 폐허가 됐지만, 첨성대엔 풍화의 흔적만 있을 뿐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다. / 김응식 사진작가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던가? 천년은 영화, 그리고 다시 천년은 폐허였다. 신라의 패망으로 더 이상 왕성일 수 없는 월성은 고려의 지배하에 3백 년 동안 방치된 채 잊혔다.

한때 ‘황금의 나라’의 왕궁으로서 휘황했던 궁궐은 햇빛과 눈비와 바람과 이슬에 바래고 삭아갔다. 그럼에도 어쩌자고 흔적조차 말끔히 사라졌단 말인가?

이에 대해 고고학계는 자연 풍화와 함께 몽골이 침입해 황룡사를 불태우면서 인접한 왕궁과 왕성이 모두 불타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월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시 ‘포은집’(1439)에 실린 정몽주의 ‘첨성대’. ‘포은집’은 세종 21년 정몽주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모아 펴낸 문집이다. 

첨성대는 우뚝이 남아있으나 문물은 간데없고, 신라의 쇠망이 남의 일 같지 않음에 정몽주는 한숨처럼 슬픔을 읊는다. 

1238년 고려 고종 25년, 몽골이 3차 침입했을 때 몽골 지휘관 탕고는 의주에서 서경(평양)과 남경(서울)을 지나 동경(경주)에까지 닿는다. 몽골의 기병은 바람처럼 빨랐다. 철제 갑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광석화 같은 기동력을 위해 그들은 춥든 덥든 가볍게 입고 유라시아 대륙을 휘저었다.

몽골군은 적이 저항하거나 복수전을 펼칠 때는 노인부터 아이까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학살했기에, 칭기즈 칸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13세기에 3천만에서 6천만 명에 달하는 세계 인구가 줄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복하는 대신 약탈하고 떠난다. 무주공산의 경주는 그 무도한 말발굽 아래 맥없이 무너졌다.

몽고병이 동경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고려사’고종25(1238) 윤4월

몽고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육존상과 전우(殿宇)가 모두 불탔다.

-‘삼국유사’ 탑상편

고지도 중 월성이 표기된 가장 오래된 것은 17세기 ‘동여비고 경상도 중부’ 지도다. 지도에서 월성은 산 아래 또렷이 자리잡고 있다. 금성과 만월성, 명활성 등은 때에 따라 빠지거나 심지어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월성만은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경주 지방을 그린 조선의 지도에서 빠지지 않고 존재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자세한 풍경을 찍은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고, 1914년 도리이 류조가 제1차 월성 조사 당시 찍은 월성의 전경은 논밭이 된 성안과 둔덕으로 남은 성벽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노래가 바로 문학이다. 월성이 불타거나 침식해 사라진 후에도 월성을 노래한 문학은 남았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천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첨성대는 반월성에 우뚝 서 있고

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구나.

문물은 이미 신라와 함께 다하였건만

슬프다. 산과 물은 고금이 같구나.

월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시는 ‘포은집’(1439)에 실린 정몽주의 ‘첨성대’다. ‘포은집’은 세종 21년 정몽주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모아 펴낸 문집이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 정도전조차 ‘도덕의 으뜸’이라고 찬했다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에게 암살당하기 전 언제쯤인가 경주를 다녀갔나 보다. 그때도 첨성대는 우뚝이 남아있으나 문물은 간데없고, 신라의 쇠망이 남의 일 같지 않음에 정몽주는 한숨처럼 슬픔을 읊는다.

국운이 쇠퇴하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폐허가 된 월성의 풍광은 여행자들을 애상에 젖게 했다.

외로운 성 약간 굽어 반달을 닮았는데

가시덤불은 다람쥐 굴을 반쯤 가리웠구나.

-이인로 ‘반월성’(‘동문선’, 1478)

아득히 지난 일을 물어볼 데라곤 없으니

모든 것이 쓸쓸하여 흥망이 서글퍼지네.

흐르는 물은 일천년 오래된 나라와 같고

찬 연기는 마흔여덟 왕의 무덤과 같네.

첨성대 위에는 배 주린 까마귀가 모여들고

반월성 곁에는 들 송아지가 올라가 있네.

분황사 가에는 붉은 사립문이 닫혀 있고

겨울 다리를 석양에 중이 혼자 건너가네.

-이유원 ‘회고시-동경회고’(‘임하필기’, 1871)

페이소스가 짐짓 감상적으로 흐르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조선시대 시가에 드러난 월성의 모습은 고고학적 발굴과 과학적 조사가 진행되는 현재도 참고할 만한 데가 있다.

조선조 내내 월성은 말 그대로 ‘빈 동산’이었다. 궁전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새는 제멋대로 정적을 깨며 지저귄다. 우거진 풀숲에서 사슴과 노루가 뛰어다닌다. 무지렁이들은 월성의 흙을 파다가 농가의 벽을 바른다.

이처럼 ‘땅도 늙고 하늘도 황폐해 다만 능곡뿐(조위 ‘반월성’(‘속동문선’, 1518))’인 궁터 앞에 서면 절로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의 ‘시편’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자가 어디 있으며, 누가 저승에서 자기 영혼을 빼내겠는가?”고 묻고, 신라의 월명사는 ‘제망매가’에서 “삶과 죽음이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라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느냐”고 탄식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래된 잠언은 시작이 있으면 끝 또한 있음을 상기하며 삶의 오만함을 경계한다.

그래서 월성의 폐허 앞에서 살아생전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세를 떠났다는 최치원을 떠올리는 시가들도 종종 눈에 띈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과 해운(海雲)이니, 당나라 유학파인 신라의 천재였으나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고 경주를 떠나 부산 해운대에 머물다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고운 학사는 바로 시선이었기에

천재에 높은 명성 만인에게 전해 오는데

어젯밤 꿈속에 분명히 서로 만나 보았네.

계림의 숲가 반월성 변두리에서.

일찍이 해운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면서

고운을 부르려다가 한번 웃음을 지었지.

듣자 하니 그는 이미 청학 타고 떠났는데

동문을 깊이 잠그고 돌아오지를 않는다네.

-서거정, ‘꿈에 계림을 유람하다가 학사 최치원을 방문하다’(‘사가집’, 148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괴롭기도 하려니와 어려운 일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며 죽음을 말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영생불멸까지는 아닐지라도 죽음을 깜박 잊고 살기에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을 다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려니, 때로는 천년 월성의 천년 폐허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림 숲 우거진 반월성은

그야말로 옛날 왕성 터이지.

천년 왕업 낙엽처럼 진 뒤

화류가 한창 분분히 번성했지.

그대 좋은 계절에 돌아가니

농염한 미색이 눈길 빼앗으리.

꽃구경하다 여가가 있거든

귀찮더라도 자주 소식 전해주오.

이행의 ‘임소인 영남으로 돌아가는 도사를 전송하다’에는 조선시대 경주의 또 다른 풍경이 등장한다. 이행은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으로, 사후 문집 ‘용재집’(1589)에 실린 이 시가는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도사(都事)인 벗을 만났다 헤어지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쁘게 보내는 환송이 아니라 서운해 보내는 전송이라 그랬을까, 중앙 관리에 비해 홀시되는 지방 관리로 떠나는 벗이 안쓰러워서였을까? 분명 이별 파티에 거나하게 취했을 터, 술김인지 홧김인지 화류며 미색이며 유학자의 시에는 좀처럼 등장하기 어려운 날것의 욕망이 쏟아진다.

패망과 폐허의 끝에는 부패와 타락이 똬리를 트는 법! 조선시대 경주는 생뚱맞게도 화류항으로 유명했나 보다. 문득 주워듣기로 신라 귀족들의 묘역인 쪽샘 지구가 1960-70년대 요정 100여 곳이 성행하는 유흥가로 이름을 날렸다니, 그 또한 기이하고 유구한 역사랄까.

문학 속에 남은 월성은 흰 재와 검은 그을음의 폐허뿐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신라는 까마득한 과거로 밀려났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개혁군주라기보다 보수주의자에 가까운 정조 임금이 ‘월성에 있는 신라 시조왕의 사당에 올리는 제문’(정조16, 1792)을 지어 바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집’(1814)에 실린 제문의 시가는 폐허의 송가(頌歌)요 그 나마의 위로다.

동해의 모퉁이 양산의 언덕에 복숭아꽃과 박 잎의 이야기는 아득한 옛적의 제해였네.

신인을 독생하여 육부의 진한에 사로국을 건국하니 왕호는 거서간이었네.

육십일 년의 평생에 무성하게 거친 초목을 제거하니 수자리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없어 잠자리가 편안하고 들에는 뽕나무 가지가 잘 자라 의식이 풍족하였네.

세대를 점치니 천년인지라 멀리 주 나라의 역년(曆年)에 이르니

명활산과 금성에서 아직도 처음의 자취를 기억하겠네.

아, 우리 열조에서 높이 보답하기에 허물이 없었으니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고 왕릉에 비석을 세웠다네.

돌아보건대 내가 광세(曠世)의 감회가 있어 문득 이날에

제관을 보내어 정성을 드리게 하노니 멀리 잔을 드림이 있나이다.

그러나 불 탄 자리에도 새로운 생명이 돋나니, 세월과 기억 속에 지워진 월성이 천년 왕성의 아름다운 위엄을 되찾는 날도 언젠가 오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