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혼자 간 영화관에서 본 기억도 게슴츠레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루디와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마틴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천국은 너무도 지리멸렬하여 바다이야기 밖엔 할 이야기가 없다’라는 이상한 믿음과 함께. 이것은 어쩌면 독일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바다까지는 너무도 멀고, 그들은 겨우 바다에 이르고, 파도소리는 너무도 청명하여 어떤 기계음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을 따러 간 사이 혼자 남은 아가가 집을 보다 파도소리에 잠이 들만큼 그 소리는 감미롭다. 바다엔 파도 소리와 더불어 그들의 허름한 차와 훔쳐온 데낄라 한 병이 있다. 반병도 비우기 전에 루디는 죽어버리고 마틴은 혼자 남아, 남은 테킬라를 마시며 죽어간다.

그런 와중에도 파도는 끊임없이 너울진다. 파도는 파도쳐 푸르기만 한데 영화는 그렇게,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렇게 끝이 난다.

△산골에서 바다 생각하기

신풍령을 넘으면 무주구천동이었다. 신풍령의 어느 능선에 있는 우리 동네 골터는 산동네 중에서도 산동네였다. 오죽하면 가정방문 온 선생님이 정말 하늘과 가까운 동네라며 감탄을 했을까?

멀리서 다가온 구름은 신풍령을 넘지 못하고 그 고갯마루에 몰려 검게 변해갔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비 아니면 눈이 내렸다. 눈은 겨울이면 사흘이 멀다 하고 내렸지만, 내릴 때마다 신기하기만 하였다. 일곱 집 우리 동네엔 개도 짖지 않았고, 눈은 시나브로 쌓여 뒤안 대나무를 활처럼 휘어놓기도 하였고, 동네를 나가는 유일한 길목을 막아 놓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주 눈이 내렸지만 여름보다는 겨울이 훨씬 수월하였다. 온통 나무였고, 온통 산이었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은 하늘이었다. 커다란 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넓은 저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넓은 들마저도 없었다. 골짜기는 마주보는 산과 산이 가까워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 곳이었기에 오히려 하늘과 바다가 닿아 기다란 선을 긋는다는 바다를 더욱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첫 사랑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렇다고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그녀의 눈과 마주치면, 남에게 들킬까봐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녀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바라만 보아도 온몸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떨렸다. 연애도 아니었고 짝사랑도 아니었다. 분명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그녀 옆에서 나란히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우리의 그 이상한 관계도 시간을 따라 그렇게 기억 저편으로 달아나버렸다.

우연히 졸업 전시회에 갔다가 그녀를 다시 만났다. 아무나 주려고 가져갔던 백합 한 다발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우연처럼 혹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혼자 앓아야 했다. 입대를 채 일주일도 안 남겼을 무렵,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다. 불쑥 그녀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다. 그녀가 말할 틈도 없이 그리고 내일쯤엔 어느 바다에라도 가자고 했다. 따귀라도 때릴 줄 알았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왜 하필이면 통영이었을까? 어줍지도 않게 그 때 읽고 있었던 ‘김약국의 딸들’때문이었을까? 아마 군대는 나의 젊음을 몰락으로 몰아가는 바다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마치 김약국의 집안을 비운과 몰락으로 몰고 가는 그 바다처럼…. 그래서 나는 통영의 쓸쓸한 겨울 바다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통영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바다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름답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사실은 아름다운지 아닌지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내 옆에 있는 그녀의 흰 피부는 바다보다 더 차갑고 투명해 보였고 그래서 그녀는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는 500m도 되지 않는 해저터널을 지루하도록 느리게 걸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바다가 터널로 밀려들었다면 덜 어색했을까. 우리는 컴컴한 터널의 정적 속을 말도 없이 하염없이 걸었다. 그녀의 손은 고왔고, 목도리를 벗은 그녀의 목은 희었지만, 나는 손을 잡을 생각도 못한 채 마른침을 삼키며, 자꾸 그녀와 부딪히는 내 왼팔을 원망스러워하며, 백년보다 천년보다 더 길게 걸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곤히 잠에 취했다. 용기였을까? 참을 수 없음이었을까? 모으고 있던 두 손을 간신히 뻗어 그녀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스르르 풀리며 내 손을 다시 감싸 안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차장 밖으로 멀어져가는 바다에는 밤이 내렸고, 바다 위 별들은 밤바람에 몸을 떨었다.

△삼천포의 달

나는 늘 삼천포로 빠지더니 결국엔 진짜 삼천포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저녁 식사 전에 남해로 지는 태양의 그늘은 바다마저 붉게 물들였다. 동해와 달리 드문드문 섬으로 이어지는 남해, 그리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남해대교와 그 사이로 석양은 앉은 자리에서 한 갑의 담배를 태우고 남을 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아침 점호를 기다리는 우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달을 잊을 수가 없다. 꽉찬 달은 힘겹게 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꼭 영화 ‘이티(ET)’의 포스터에서 보았던 달 만큼이나 컸고, 그 빛은 겨울 새벽바람을 잊게 할 만큼 자애로웠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 생경한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했다. 저 달이 바다 저기쯤에 풍덩하고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그런 상상. 그러면 그 커다란 달은 깊이도 알 수 없는 바다 저 밑으로 한 없이 떨어질 것이고, 그 커다란 달에 놀란 고등어, 갈치, 숭어, 망둥이 할 것 없이 모두 뛰어오를 것이고, 그 커다란 달에 불어난 바다는 사람들이 잠들었을 저 마을로 밀려들 것이고, 파도는 누구누구 집 가릴 것 없이 담을 넘어 마당으로 마루로 몰아칠 것이라는 상상. 그 파도가 빠져나갈 쯤엔 무슨 일인가 하고 중년의 남자가 하품을 하며 방문을 나설지도 모르지. 그러면 미처 도를 따라가지 못한 물고기가 마당에 마루에 질펀하게 늘려 퍼덕거릴 것이고, 그러면 잠이 들깬 남자는 놀란 눈을 부빌 것이고, 그러는 사이 아버지를 따라 나온 세 살 박이 아들은 아랫도리도 입지 않은 채 쭈그리고 앉아 등 푸른 생선의 옆구리를 푹푹 찌르며 까르르 까르르 웃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