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 허물어야 하는
벽(壁), 허물어야 하는
  • 등록일 2019.05.15 20:26
  • 게재일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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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규열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의사이며 미생물학자인 소크(Jonas Salk)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50년 후에 곤충들이 사라진다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지만, 50년 후에 인간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였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이 땅을 살리기 보다 망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구와 환경을 망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와 사회 구조마저 혼탁과 오염을 거듭하게 하여 황폐하게 만드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망가질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지도 못하는 더럽고 누추한 세상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구와 인류에 해가 되기보다 도움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부는 왜 하는가. 개인이 성공에 이르는 데 물론 힘이 되겠지만 더 배우는 까닭은 배움의 총량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아니었을까. 전문가와 학자들은 분야마다 차고 넘치는데, 실질적인 개선과 회복에 어떤 기여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존경받는 지성인들은 그저 권력의 이해에만 복무하는 사람들이다’라며 빈정거린 것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을 덜 하고 있다는 따끔한 지적이 아닌가. 개선과 변화, 진보와 혁신에 도움이 될 만한 비판과 제언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함을 꼬집은 것이다. 언론이 문제라는데, 살피며 대안을 이야기하는 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병들었는데, 몰아세우며 다그치는 전문가는 어디 갔는가. 교회와 사찰이 저 모양인데 신학교와 현인들은 무엇 하는가.

전문가 집단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보통 사람들이야 바람에 휘둘릴 밖에. 이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그 소리도 틀리지 않는다. 사회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온통 혼동스럽고 안개 속이다. 이웃과 대화가 없는가 했더니 이젠 가족과도 소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은 보다 똑똑해 졌는가 싶지만 사회는 보이지 않는 벽들로 한 가득이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 세대격차에 함몰된 사람들, 빈부양극에 짓눌린 사람들, 양성차별에 억울한 사람들, 학벌과 지연, 격차와 차별, 혐오와 차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 자폐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가면 나아져야 할 터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에 처박히는 느낌은 어찌해야 하는가.

드러나는 생각도 덜 깊어 보이는데, 사용하는 언어마저 저열하고 비속하다. 벽을 허물어야 하는데, 표현이 거칠면 본질에서 멀어져 감정만 상할 뿐이다. 감정이 상하면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가능성은 희박해 질 수 밖에. 저속한 한 마디를 뱉고 돌아서 ‘속이 시원하다’면 국민이 믿고 맡길 공복(公僕)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동서냉전의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부시(George Bush)는 ‘보다 친절하고 보다 부드러운 나라’가 되자고 미국인들에게 제의하였다. 악다구니 끝에 상처투성이가 되면, 이기든 지든 남는 게 없다. 선거철이 되면 똑같은 아귀다툼에 사회는 멍든 질곡을 반복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잃고 부유(浮遊)할 것이 아닌가.

소통이 바뀌어야 한다. 담론의 장이 넓어져야 하며 보통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학자와 전문가들이 토론과 담론을 이끌어 조절과 조정에 나서야 하며, 생각과 의견이 조화롭게 적극 개진되도록 부추겨야 한다. 대화와 나눔이 활발해져야 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절제와 균형을 갖춘 격을 회복하여야 한다. 친절하고 부드러워야 막힘없는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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