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인간의 것이기에 아무리 멀리까지 걸어도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나 예술은 길의 바깥이므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예술 작품을 만난다하더라도 여유롭게 바라봐 주시길.

언젠가 황현산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시간이 있었다. (황현산 선생은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1945년 목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의 교수로 재직했다. 선생은 언뜻 배우 신구를 닮은 듯한 평안한 인상을 지녔고 말소리도 그윽하다. 학자로도 평론가로도 손색이 없다. 선생은 이 시대의 문장가로 그의 글을 읽으면 한 문장 한 문장이 몸속에 각인되는 느낌이다. 그의 책 ‘밤이 선생이다’를 추천한다.)

그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글을 읽다보면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 이를 테면 ‘악착스럽다’, ‘해찰’, ‘몸피’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왜 이렇게 어렵게 생소한 낱말을 쓰는지 듣고 싶습니다.” 선생의 정확한 워딩이 생각나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글은 전장터와 같습니다. 이 전장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평론가들과 구별되는 저만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다른 평론가와 구별되는 저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특색 있는 어휘를 사용합니다.”

언어는 그 사람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시정잡배의 언어가 있고, 그윽한 사람의 그윽한 언어가 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언어를 결정하기도 하지만 때로 언어가 우리의 정신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승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얼마나 신중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그랑’을 소환하는 것이 좋겠다. 까뮈의 ‘페스트’에 등장했던 그 그랑 말이다.

“말 탄 여인은 어떻게 됐어요?” 타루가 자주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랑은 한결같이 “달리고 있죠. 달리고 있어요.”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느 날 저녁, 그랑은 말 탄 여인에 대해 ‘우아한’이라는 형용사를 완전히 포기하고 앞으로는 ‘날씬한’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더 구체적이거든요.” 그가 덧붙여 말했다. 한 번은 이 두 명의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수정한 첫 문장을 읽어주었다. “5월 어느 화창한 아침에, 날씬한 여인 한 명이 근사한 밤색 암말을 타고 불로뉴 숲의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

“어때요?” 그랑이 말했다. “그 여인이 더 잘 보이지 않나요? 그리고 ‘5월의’ 라고 하면 문장의 속도가 좀 늘어지는 것 같거든요” 그러고는 ‘근사한’이라는 형용사 때문에 무척 고심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단어로는 생생한 느낌을 전달할 수 없엇다. 그래서 자기가 상상한 멋진 암말을 사진 찍듯 단번에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을 찾고 있었다. ‘살이 오른’도 어울리지 않았다.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약간 경멸적인 의미가 느껴졌다. ‘윤기가 도는’에 마음에 끌린 적도 있지만 리듬이 적당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검은 밤색 암말’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검은색은 은근히 우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랑은 “모자를 벗으시오.”라는 말을 듣기 위해 매일 매일 글을 쓴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장에 머물러 있다. ‘우아한’을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날씬한’으로 바꾸고 ‘5월의’가 문장의 속도를 느리게 한다는 이유로 ‘5월’로 바꾼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고, 바꾸고 나면 다시 그 단어에 균열이 생긴다. 그랑이 ‘근사한 밤색 암말’을 ‘검은 밤색 암말’로 바꾸고 의기양양해 하지만 리외가 바로 반론을 펼친다.

“그건 안 돼요.” 리외가 말했다.

“왜요?”

“‘밤색’이라는 단어는 말의 품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을 가르키니까요.”

“어떤 색요?”

“글쎄요, 어쨌든 검은색은 아니죠!”

그랑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이 계서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선생님도 아시겠죠.”

그랑은 완벽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수년 아니 수십 년 동안 이 일에 매달려오고 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공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끝없이 고치고 고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문장에 닿는 것은 요원하다. 그랑이 생각하는 완전한 문장이란 말을 타고 사뿐히 달릴 때 ‘달그락 달그락’하는 말발굽소리와 그 속도, 그리고 문장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이미지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내면 그 뒤로 이어지는 글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그랑은 생각한다.

그랑의 바람은 언제나 좌절되지만 그랑은 끝없이 새롭게 시작한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들을 다 대입해보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 완전히 딱 맞는 단어를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일, 이것이 작가의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작가는 끝없이 쓰고 끝없이 고치길 반복한다. 그때 작가는 작가로서 성공하게 된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이라는 책을 통해 성공의 공식을 소개하고 있다. 수천, 수만 명의 성공한 사람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수년에 걸쳐 수없이 많은 공식과 수없이 많은 그래프를 그려낸 후 그녀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성공=재능×노력×노력

흔히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아마 작가가 되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글 좀 쓴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남보다 나은 재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재능을 믿고 이 재능에 만족하는 글을 쓴 사람은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글 좀 쓰는 친구로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노력을 한 친구는 글 쓰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다시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노력을 퍼부으면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것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게 노력해서 일가를 이룬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다. 작가가 쓴 글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 않고, 심지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의 작품은 주인을 따라 나온 개와도 같다. 황현산은 이러한 작품 혹은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아이와 어머니가 품은) 목표는 마음속에 움터 오르는 온갖 생각을 다스리고 우리를 향해 노동하며 걸어온다. 그러나 개는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을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길을 멀리 벗어났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이 겨울 풍경 속에서 해찰한다. 개는 지금 노동하는 주인들의 휴식이다. 망치로 두더지의 머리를 때리듯이 주인들이 억눌러버리거나 한쪽에 제쳐놓은 생각들을, 아니, 그 생각들보다 더 아래에 깔려 솟아오르지도 못하는 생각들을, 그래서 생각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생각들을 개는 주인들을 대신하여 생각하며, 이 겨울의 스산한 들판을 회색 꿈의 자리로 만든다. 그리고 또 거기서 비껴 선다.”

해찰이란 ‘마음에 썩 내키지 아니하여 물건을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려 해치다.’라는 뜻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헤적거림, 쓸모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