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 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였다. 북·러 정상회담은 ‘힘(power)’과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지난 2월 베트남에서 개최된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됨으로써 북한의 비핵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 이루어진 이번 북·러 정상회담은 양국이 상호협력을 통하여 대미협상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정치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힘의 열세에서 초래되는 북·미 협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후원도 절실하다. 북·러 협력의 강화는 북한의 대미협상력을 제고시켜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완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동시적 비핵화방식을 지지해 왔다는 점에서 북·중·러 3국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도 있다. 또한 경제적 차원에서 러시아는 유엔제재로 인한 북한의 경제난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현재 러시아에서 일하고 있는 만 여 명의 외화벌이 노동자들의 체류기간이 연말에 만료됨으로써 초래되는 추방위기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한편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김정은의 방문은 한반도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러시아는 북·미 중심의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중국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북·러 정상회담의 개최를 지속적으로 타진해 왔다. 북한이 중국에 지나치게 편향되는 것은 러시아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러시아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며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항하여 러시아의 국익을 확대하기 위하여 북한 및 북·미 협상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북한의 비핵화에 따른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자신을 포함한 ‘6자(남·북·미·중·일·러)회담’과 같은 ‘다자안보체제’가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북·러 정상회담은 ‘힘’과 ‘국가이익’이라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에 철저히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북한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한 앞으로도 북·미 비핵화협상의 과정에서 양자 간 협력은 물론이고, 북·중·러 3국의 공조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외교는 어떠한가? 북한의 비핵화 협상전략을 둘러싸고 한·미 동맹은 균열되고 있고, 한·일 관계는 사상 최악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과 공조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한·미 동맹관계에 있는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 참담한 것은 현 정부가 집권이후 남북협력에 거의 올인 하다시피 했는데 김정은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는 비판이었다. 이처럼 현재 한국의 외교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이것은 현 정부가 힘과 국가이익이 지배하고 있는 국제정치의 본질적 속성을 경시하고 ‘무지개’를 쫓아다닌 결과이다. 북한의 비핵화라는 이상(理想)은 냉혹하고 변화무쌍한 국제정치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토대를 둔 전략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나고 만다.

따라서 이제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실질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역사는 어떤 외교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한반도문제의 이해 당사국들은 모두가 현실주의 외교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오직 우리 정부만 이상주의에 집착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