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지난 4월 11일은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 되는 날이다. 올해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임정 기념식을 거행했다.

상해 임정은 1919년 3·1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출범해 자주 독립과 민족해방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지난주 미국 상하원에서도 임정이 한국 민주발전의 토대가 되었음을 결의안을 통해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국내의 3·1 운동은 잘 기억하면서도 같은 해 설립된 임정의 역사는 망각하고 있었다. 다시 2019년, 임정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임정 26년의 민족사적 함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선 상해 임정은 1919년 3·1 운동의 연장선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은 한말 일제에 의해 허무하게 국권을 상실하였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과정에서 이 나라 총리대신 이완용 뿐 아니라 상당수 관료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러나 당시 지조있는 애국선혈들은 국내 의병 투쟁을 전개하다 상해 임시 정부까지 결성해 조국 해방 전선에 아낌없이 헌신했던 것이다. 해방 시까지 임정요인들은 중국 망명지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들이 이국땅에서의 헌신적인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직도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상해 임정이 국내외의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해 단일 대오의 독립운동을 했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상해 임정은 초기 지도자들 간 불화를 극복하고 한성과 연해주의 임정을 하나의 임정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중국에서 중국 국민당의 상당한 지원을 받기도 하고, 일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임정은 내부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1945년 8·15 해방 시까지 26년간 통합된 임정의 역할에 충실했다. 중국의 정부문헌과 학계에서도 임정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방 후 임정 요인인 김구와 여운형, 송진우 등이 희생됐다. 정부 수립과정에서의 임정의 정치적 거목들이 희생시켰음은 안타까운 일이며, 민족사의 비극이다.

상해 임정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출범해 여섯 차례나 임정 청사를 옮겨 가는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중경에서 갑작스런 해방을 맞이했다. 지난해 필자는 상해에서 출발하여 항주, 소주, 장사를 거쳐 중경까지 임정의 피난길을 추적해 본적이 있다.

특히 임정은 오늘의 국회에 해당되는 의정원을 갖추고, 오늘의 헌법격인 임시 헌장을 통해 민주 공화정이라는 정체와 국체를 분명히 했다. 당시 임정요인들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국내외 조직을 관리하고 광복군을 양성하면서 제한된 형태이지만 외교권까지 행사했음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임정의 이러한 역사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에서는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남한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 행위자마저 척결하지 못했다. 특히 정부 수립 후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들이 친일 관료들에 의해 조사받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의혈단 선봉인 김원봉이 친일 형사 노덕술에게 취조를 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당시부터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반일하면 삼대가 망한다.’ 속설이 유포된 배경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관한 진정한 사과는 없다. 이는 여태껏 민족의 자주성을 세우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가 임정의 역사를 바르게 살피고 민족의 정기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그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