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정문화부장
윤희정 문화부장

1920~3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의 선조들은 하나로 뭉쳐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었다. 각자의 생각과 이념에 따라 중국 대륙에서 따로 활동하던 독립군 상당수는 100여 년 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중심으로 ‘일제 타도’라는 한 깃발 아래 한마음 한뜻을 모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이념전쟁’ 중이다. 진보-보수로 나뉘어 태극기-촛불 집회로 국민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20세기 전반기 한민족은 35년에 걸친 긴 일제식민지지배와 3년 동안의 미 군정 시기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헤쳐나가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그 대표적인 역사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 8월까지 27년여 동안 부여된 책임과 소임을 수행했다. 임시정부의 민족국가 수립 방안은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임시정부헌장’에 담겨 있다. 임시헌장 제1조에 제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는 역사적인 대전환이었다. 독립쟁취 이후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대원칙이 천명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경북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내외에서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펼쳤다. 독립 열망의 뜨거운 중심에 경북의 민초들이 있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북인이 120명이 넘는다. 이들이 대한민국 탄생과 정부수립에 크게 기여했음은 자명하다.

김동삼·남형우는 첫 임시의정원 회의(1919년 4월10∼11일)부터 함께했다. 같은 해 9월17일까지 열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도 김동삼·김응섭, 김창숙, 김정묵, 손진형 등이 참여했다. 경북인은 임시정부 국내 연락 행정망인 연통제·교통국과 연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자금지원 활동을 했다. 임시정부 활동이 약화한 시기에는 김동삼이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활약했고, 안동 임청각 주인 이상룡 형제들은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광복군관학교 건립 자금을 충당했다.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1940년 긴 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을 한데 묶어 통합정부를 꾸렸다. 이 시기 권준, 김상덕, 류림 등이 정부와 의정원에서 활약했다. 3·1 만세운동 때는 경북 여성들도 큰 역할을 했다. 남자현, 김락, 임봉선, 김정희, 윤악이, 신분금 등이 3·1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발발한 국채보상운동은 2천만 국민이 석 달간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일본에 진 국채 1천300만 원을 갚고 독립을 이룩하자는 운동이었다. 여성들은 한 끼에 한 숟가락씩 쌀을 모아 빚을 갚았다. 여러 독립운동가가 나고 자란 대구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렸다. 시민들은 대구의 독립운동가로 이상정, 이육사, 이시영 등을 많이 떠올린다. 이들 외에도 조명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대구 곳곳에 존재한다.

선조들이 술선수범한 불굴의 저항정신과 의리, 혼을 오롯이 제대로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자유와 행복 그리고 풍요로움이 가득한, 지속 가능한 나라를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갈린 좌-우파 대결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계기로 첨예한 이념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한다. 극심한 이념 분쟁과 반목이 혼재하는 나라가 이렇게 계속돼선 안 된다. 진정한 광복과 부끄럽지 않은 독립을 추구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