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겉은 떡이고 속은 고기’ 예로부터 귀한 음식

소룡포. 소룡포는 포자의 일종으로 원래 이름은 ‘소룡포자’다.

개인적이고 엉뚱한 ‘추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두와 ‘50환짜리 백동전’ 이야기다. 50환짜리 백동전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통용됐다. ‘5원’짜리 동전으로 썼다.

1970년 무렵. 대구 시내버스 차비가 4원에서 6원으로 올랐다. 50% 인상. 왕복 차비가 8원에서 12원으로 올랐다. 통학하던 중학생들은 끔찍해졌다. 10원 지폐 한 장 받아서 8원 쓰고, 나머지 2원으로 군것질을 했는데 그게 불가능해졌다. 군것질은 학교 앞에서 팔던 ‘납작만두’였다. 이제 납작만두를 먹으려면, 1시간 거리 하굣길을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납작만두를 포기할 수도 없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누구 발상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인상 충격’을 줄이는 방안이 나왔다. 버스 차비 6원을 내는데, 10원 지폐를 내면 비닐봉지에 든 4원을 거스름으로 준다. ‘50환 백동전’을 내면 그대로 인정해준다.

지금 생각하면 엉뚱했지만, 제법 긴 기간 동안 ‘50환 백동전=6원’ 셈법이 통용됐다. 이런 ‘훌륭한 제도’는 빨리 퍼진다. 대구 시내 모든 중학생들이 50환 백동전으로 버스비를 냈다. 방과 후에는 죄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1원에 5개쯤 주는 납작만두를 베어 물었다.

 

고려사 충혜왕 4년 기록에 ‘만두 도둑’이 등장한다. 궁궐 주방에 들어와 만두를 훔쳐먹은 도둑이 있었고, 왕이 도둑을 죽이라고 명했다는 내용.

“그까짓 만두를 훔쳐먹었다고 사람을 죽이냐?”

경북 김천의 어느 유명한 만둣집의 만두. 정확하게는 만두가 아니라 포자다.
경북 김천의 어느 유명한 만둣집의 만두. 정확하게는 만두가 아니라 포자다.

◇ 만두를 제갈공명이 만들었다고?

납작만두도 만두다. 만두라 부르긴 잔망스럽지만, 만두는 만두다. 만두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어디서 와서 대구에서 ‘납작하게’ 됐을까?

‘성호사설_제4권_만물문’에 나오는 만두 이야기다.

“(전략) 만두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노수(瀘水)에서 제사 지낼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역시 겉은 떡이고 속은 고기이다. 다만 뇌환은 작고 만두는 크며, 뇌환은 밀가루로 뭉쳐서 만들고 만두는 떡으로 만드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후략)”

‘성호사설’은 성호 이익(1681~1763년)이 쓴 책이다. 1740년 무렵 편집되었다. 위 내용에 만두와 만두보다 작은 ‘뇌환(牢丸)’이라는 음식도 등장한다. 만두와 뇌환 모두 겉은 떡, 속은 고기다. 만두는, ‘곡물로 만든 피+고기로 만든 소’다.

“(만두는) 노수에서 제사 지낼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문구가 나온다. ‘제갈공명 노수대제(瀘水大祭) 만두 기원설’이다. 엉터리다. 후한 촉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181년 출생해서 234년에 죽었다. 6세기에 나온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에 곡물 가루음식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지만, 아직 만두라는 이름도 정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제갈공명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이는 노수를 만났다. 노인들이 “사람 머리 49두를 강물에 던지고 제사 지내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한다. 제갈량은 “전쟁터에서 이미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또 죽일 수는 없다”며 양고기로 속을 만들고, 겉에는 밀가루 반죽을 더해서 사람 머리 모양의 ‘蠻頭(만두)’로 제사를 모셨다. ‘만두(蠻頭)’, 남만 인의 머리에서 음식 만두(饅頭)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제갈공명을 신격화하기 위해 후대 민중들이 만든 이야기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연의’는 소설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노수를 간 흔적도, 노수대제도 없다. 가지도 않은 곳에서 무슨 만두를 빚었으랴? 만두도 없었던 시절에.

 

사희교자. 중국인들이 기쁜 일이 있을 때 내놓는 교자다.
사희교자. 중국인들이 기쁜 일이 있을 때 내놓는 교자다.

◇ 만둣집 주인이 내 손목을 잡았다?

고려 시대 가요 ‘쌍화점’의 시작 부분이다.

“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점(店)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후략).”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이 말이 가게 밖에 들고 나면/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만두가 반드시 둥근 모양은 아니다. 흔히 ‘여름철 만두’라 부르는 편수.
만두가 반드시 둥근 모양은 아니다. 흔히 ‘여름철 만두’라 부르는 편수.

‘쌍화’는 한반도식 만두다. 쌍화는 ‘상화(霜花)’에서 비롯됐다. 상화는 만두 등을 찔 때 생기는 뽀얀 수증기, 서리꽃이다. 곡물 덩어리를 찐 음식을 상화, 쌍화로 부르는 이유다. ‘쌍화점’에 대한 이론도 있다. 쌍화점이 만둣가게가 아니라 세공 유리제품 등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였다는 주장.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쌍화가 만두가 아니라 단 것으로 속을 채운 찐빵, 호빵류였다는 것이다. 아직은 ‘만둣가게’가 다수설이다.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년) 시기의 작품이다.

만둣가게의 주인은 회회아비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아라비아 사람 등 외국인이 많았다. 몽골의 원나라는 기술력이 뛰어난 아라비아 사람, 색목인(色目人)을 중용했다. 수도 개성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만둣가게가 있었다.

만두는 유목민족의 음식이었다는 주장이 다수설이다. 거란의 요나라(大遼, 916~1125년) 벽화에도 만두 찌는 그림이 있다. 원나라 시절 유목민족에 의해 한반도에 전래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사 충혜왕 4년(1343년)의 기록에는 ‘만두 도둑’이 등장한다. 궁궐 주방에 들어와 만두를 훔쳐먹은 도둑이 있었고, 왕이 도둑을 죽이라고 명했다는 내용. “그까짓 만두를 훔쳐먹었다고 사람을 죽이냐?”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만두는 귀한 물건이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를 살았던 목은 이색(1328~1396년)도 만두에 대해서 시를 남겼다. ‘목은집’의 ‘금주음(衿州吟)’이다.

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산승(山僧)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자빠질 일/흰 눈처럼 쌓은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기름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당시 만두 겉껍질 재료는 메밀이었다. 목은의 만두는 메밀 겉껍질을 벗긴 녹쌀 정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_세종 4년(1422년) 5월17일’의 기록에도 만두가 나타난다.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를 앞두고, “(행사 참석인원 들의 밥상에) 만두(饅頭), 면(麵),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후략)”라고 신하들이 말한다.

‘쌍화점’과 궁궐 주방의 만두 도둑, 목은이 스님에게 대접받은 만두, 세종대왕의 수륙재 만두는 약 100년 남짓의 차이가 난다. 만두는 귀한 음식이었다.

 

만두는 한반도에 들어온 다음 ‘만두+국물’로 변신한다. 만둣국이다.
만두는 한반도에 들어온 다음 ‘만두+국물’로 변신한다. 만둣국이다.

◇ 만두는, 곡물 껍질 속에 고기, 채소, 생선 등을 넣고 만든 음식

곡물로 만든 껍질에 속을 채운 것이 바로 만두. 만두 속은 고기, 채소, 생선 등이 주류를 이룬다. 단맛을 내는 소도 있다. 찐빵, 호빵 같은 만두다. 고려, 조선 시대 내내 만두, 쌍화, 상화는 혼란스럽다. 한반도 자체 개발품 만두, 상화와 외래 만두가 뒤섞인다. 단맛이 나는 것과 짭조름한 것, 빵과 떡의 차이 등이 혼란을 부른다.

만두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 깔조네, 남미대륙의 또르띠야도 만두다. ‘남미식 만두’는 곡물이 옥수수다. 몽골에도 만두가 있다. 보츠, 호쇼르 등이다. 문명권 국가에는 대부분 만두가 있다.

겉껍질인 피도 밀, 메밀, 서양의 경질 밀(硬質, durum wheat), 옥수수, 감자와 고구마 전분 등 여러 종류를 사용한다. 속은 지역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조선시대, 한반도 만두의 껍질은 메밀이었다. 추사 김정희 ‘완당전집_10권_시’에도 “메밀꽃 희끗희끗 은속은 눈부시니/온 산에 뒤덮인 게 다 만두의 재료로세”라고 했다. ‘은속(銀粟)’은 조, 좁쌀로 추정한다. 쌀과 밀가루는 귀했고, 만두는 주로 메밀, 좁쌀로 만들었다. 메밀로 만든 건 만두, 옥수숫가루로 만들면 만두가 아니다? 이것도 어색하다.

우리는 ‘만두’를 섬세하게 가르지 않았다. 곡물 피로 겉을, 각종 고기, 생선, 채소 등을 속으로 만든 건 모두 ‘만두’라고 부른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인들은 만두, 교자, 포자를 섬세하게 나눈다. 만두(饅頭, mantou)는 반드시 발효한 밀가루 등 곡물가루로 만든 ‘중국식 밀가루 빵’이다. 속이 없는 찐빵이나 중식당에서 내놓는 꽃빵이 만두다. 한, 중, 일이 일치하는 음식은 교자(餃子)다. 발효시키지 않은, 생피로 만든 겉껍질에 채소, 고기, 생선 등으로 속을 채운 것이다. 찌거나 삶으면 증교자(蒸餃子), 수교자(水餃子)다. 오늘날 우리가 ‘군만두’라고 부르는 것은 ‘튀김만두’다.

포자(包子)는, 발효한 밀가루 반죽으로 겉껍질을 만들고 속에는 생선, 고기, 채소 등을 넣은 것이다. 윗부분을 마치 보자기 묶듯이 틀어 올린다. 뜨거운 육즙으로 유명한 ‘소룡포(小籠包)’는 ‘소룡포자(小籠包子)’의 준말이다. 포자의 일종이다.

우리는 음식을 잘 섞는다. 중국인들은 상상도 못할 ‘교자 만두’도 만들었다. 교자면 교자고, 만두면 만두다. 한반도에는 교자 만두도 있다.

사족. 나이가 든 후, 어머니께 납작만두 사 먹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 일이니 기억이 아물아물. 한참 설명했다. 어머님 왈 “아, 만두 찌지미 말하는구나!”

온 세계를 떠돌았던 만두가 한반도에서 ‘만두+전(煎)’이 되었다. 만두, 교자, 포자, 상화, 쌍화가 뒤섞였다고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한반도에서는 만두가 부침개가 되기도 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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