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포항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재해와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포항사람(浦項人)들은 특유의 기질로 그때마다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아왔다. 굵직한 재해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사건이라면 1923년 4월 12일에 발생하였던 유례없는 폭풍우로 인한 재해였다. 당시 포항경찰서가 피해상황을 공식 집계한 기록만 보더라도 사망자 311명, 행방불명자 355명으로 인명피해는 공교롭게도 ‘666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1만명이 조금 넘었던 포항면 인구의 6% 가까운 수치에 해당한다. 그밖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조난 선박도 95척에 달하였다. 당시의 경제상황은 청어, 고등어와 같은 영일만 앞바다의 어획량에 따라 좌우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쓸려나간 당시 포항면의 실상을 일부 자료에서는 현세의 생지옥이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전무후무한 대참사였다. 그러나 그때의 선조 포항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자신의 이익보다는 도시 전체의 기능 회복에 매달려 포항항을 축조하고 형산강 대개수 작업을 통해 약 600만평 규모의 수혜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이후 포항읍으로 포항시로 발전하는 뚝심을 발휘하였다.

두 번째 사건으로는 한국전쟁을 빠뜨릴 수 없다. 당시 낙동강전투의 최후 방어선이 포항이었던 만큼 포항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당시 시가지 사진을 살펴보면 도시가 모두 파괴되고 오직 교회건물 하나만 지평선에 나타나 있었을 정도였다. 그 때에도 포항인은 대한민국의 수호자라는 자부심과 전후복구를 위해서는 동해안 유일의 무역항을 조기 수습해야한다는 사명감, 거친 파도와 상어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기를 잡아 올리던 강인한 정신력으로 두 번째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포항시는 이제 포항지진이라는 역사적인 세 번째 사건을 겪었다. 포항지진의 모습이 영상으로 전국에 전파된 데다 인구까지 감소하였다고 하니 모르는 사람들은 과거 70, 80년대에 타지에서 흘러들어왔던 산업인력들이 위기가 닥치자 삶의 터전을 버리고 포항을 떠났을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지진피해가 극심했던 포항 북구, 그중에서도 흥해 지역 등에는 오히려 인구가 늘어났다. 지진발생 전부터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국내 철강업체의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공장 통폐합과정에서 일자리를 중심으로 남구지역의 인구가 유출된 것에 불과하다. 일종의 오비이락인 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기요인으로 기업체와 연동되는 인구는 지역경제가 다시 활성화되면 다시 돌아오기 쉽다. 어지간한 자연재해로는 피해가 없는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 생활하던 포항인 들에게 발생한 세 번째 사건은 유례가 없던 지진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그리고 살기 좋은 도시 포항으로 이사하려던 이들의 발걸음도 주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합동조사단의 발표는 이와 같은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이제 포항인은 과거의 뚝심을 다시 한 번 발휘해야 할 때가 왔다. 물론 ‘피해보상’도 중요하다. 그것은 전문성을 지닌 분들에게 믿고 맡기면 된다. 모든 시민단체가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앞으로 포항시가 어떠한 이미지의 도시로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지, 어떤 프로젝트로 포항의 경기를 살리고 재도약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에 주목해야 한다. 포항인이 과거 근현대사를 통해 겪었던 괴멸적인 재해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도시 포항을 만들어내었던 것처럼 포항인의 기질을 다시 한 번 발휘해야 할 때다. 모처럼 다가온 포항의 도시재생, 도시재개발로 도약할 최고의 타이밍을 보상이나 소송이라는 문제에만 쏠려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