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국문학과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

3월은 여전히 꽃샘추위가 한창이지만 왠지 달이 주는 어감 때문인지 벌써 ‘봄’이 온 것같은 느낌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봄, 이러한 ‘봄’에 우리 선조들(특히 여성들)은 무엇을 했을까?

음력 삼짇날이 되면,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은 친족 혹은 이웃들과 삼삼오오 야외로 나가 꽃놀이를 즐기곤 했다. 이를 화전놀이라고 하는데, 화전놀이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한해의 시작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화전놀이의 전통은 신라 때부터 있어 왔다. ‘교남지(嶠南誌)’에는 궁인(宮人)들이 봄놀이 하며 꽃을 꺾은 데서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유래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책 고적 조에는, 매년 송화(松花)가 가득한 봄이면, 집안의 부녀자들이 재매곡(財買谷: 김유신의 맏딸 재매 부인을 묻은 자리) 골짜기 입구에 초막을 하나 지어 송화방(松花房)이라 부르며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 산, 꽃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 놀이를 위한 초막까지 따로 얽었으니, 송화로 전 부쳐 먹었을 풍경이 눈에 선하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조에 와서도 이어지던 바였다. 세조 3년 4월 22일(을묘)의 실록 기록에도 무풍(巫風)이 성행하여 도성의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며 날이 저물도록 즐겼는데, 귀가(貴家)의 부인들 또한 이를 많이 본받아 장막을 크게 설치하고는 며느리들을 다 모아서 호세(豪勢)와 사치를 다투어 준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진달래꽃(杜鵑花)이 필 무렵에는 이러한 행사를 더욱 자주 했으며 이를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특별히 부르기도 했다.

이렇듯 나와 남이 한데 모여 먹고 놀고 마시며 이야기하는 화전놀이판은 그야말로 신명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반드시 이 놀이판이 소비적이거나 향락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즐거운 놀이판, 그 신명풀이의 화전놀이의 공간 속에는 그간 깊이 감춰왔던 아픔과 고통이 실타래 풀어지듯 하면서 ‘너’와 ‘나’가 하나로 봉합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봉합의 과정은 다름 아닌,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고전 시가 중 ‘덴동어미화전가’라는 가사가 있다. 이 노래는 불에 덴 아이(덴동이)를 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네 차례나 결혼했지만 모두 상부(喪夫)로 점철된 삶을 살게 된 한 여인의 인생 역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덴동어미는 갓 스물 결혼할 당시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한없이 어리고 방황하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후 무수한 타자들(남편들)과의 균열과 실패로 얼룩진 삶을 살아가면서 점차 인생을 알아가게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됨으로써 성숙된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장통의 결과로, 마침내 모든 것이 심(心)이라는 글자 하나, 곧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핍진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덴동어미의 진심은 다른 사람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된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젖어 화전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청춘과부에게 먼저 다가가 고민을 함께 한 덴동어미, 그가 보여준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 능력은 결국 봄춘(春)자 꽃화(花)자 노래를 부르며 마침내 놀이판에 서먹서먹하던 타자들을 한 데 묶는 거멀못 역할을 한다. 이처럼 화전놀이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장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면서, 타자와의 화합을 꿈꾸던 공간이었다. 우리 옛 할머니, 어머니들은 긴 겨울을 뒤로 보내며 이처럼 소통과 화합의 화전놀이로 한해의 시작을 의미있게 준비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3월, 새 봄의 시작이다. 모쪼록 봄이 주는 따스함과 더불어 이러한 타자를 향한 소통과 공감의 시간으로 첫 발걸음을 떼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