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여러 해 동안 학기 시작 초 대학생들에게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의 한 장짜리 리포트를 부여한바 있다. 정답이 없는 자유로운 숙제인데도 학생들은 쓰기가 힘들다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자신의 성장과정, 가족 관계, 현재의 입장만을 열거하고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술하는 데는 부족했다. 종교를 가진 일부 학생들이 자신의 절대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자신 있게 써 내려가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신의 현재의 삶에 만족치 못하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그것이 자신과 화해(和解)하지 못하고 자존감마저 상실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세상에는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여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외적 평가나 자극에만 민감하여 내적으로 자신의 헛된 욕망을 채우려는 경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과시하는 것도 ‘거짓 자아’에 의존한 결과이다. 거짓 자아는 때로는 열등감으로 때로는 상대에 대한 지배나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이를 ‘자기 방어’ 기제라 명명하였다. 자신의 결점이나 능력을 감추기 위하여 자신을 방어하려는 욕망은 거짓 자아와 결합한다. 인간이 강한 자에게 아부하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매저키즘이나 새디즘적 본능도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의 삶에는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다. 그것이 때로는 상처로 남는다. 결국 그것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요인이며 자존감을 상실케 하고 타인과의 관계마저 단절시킨다.

자신과 화해하는 삶은 자신의 참 자아에 일치하는 삶이다. 인간은 자신을 바르게 알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자존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사회적 일탈행위나 자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자신의 약점과 장점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긍정적인 삶이 자신과의 화해하는 길이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삶이며 자신의 부족을 메우려는 긍정적인 삶이다. 그러한 삶속에는 거짓자아는 발동할 수 없으며 에릭슨은 이를 ‘통합자아’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신과 화해하는 삶은 신앙인이 절대자 앞에서 겸손하듯이 자신에게 정직하고 솔직한 삶이 될 수 있으며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직하고 공정한 사회는 자신과 화해한 사람이 많은 사회이다. 자신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회이다. 도덕성과 준법성이 살아 숨 쉬는 선진사회는 대체로 개인의 긍정적 자아가 발달한 사회이다. 우리의 삶에는 물질과 경제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어선 선진사회라고 하지만 아직도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는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자살률이 세계 1위이고 교통사고가 빈발하고, 정치적 갈등이 난무하는 사회이다. 일본의 집단주의적 정치는 형편없지만 국민 개개인의 민도는 우리보다 높다.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며 그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우리도 극일(克日)을 위해서 그들 개개인의 정직성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마주해야 한다. 참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용한 자기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의 널려있는 매스미디어는 참 자아를 방해하고 자신과 화해까지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과의 화해는 인격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은 바쁠수록 일기를 쓰는 등 자신과 대화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 그것을 안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묵상, 불교의 참선은 결국 인간이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함을 일깨우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자신과 화해하는 성찰의 계절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