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학교가 생동감을 찾았다. 겨우내 주인을 기다려 온 책걸상은 물론 교실이 주인을 만나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긴 기다림 뒤의 재회는 늘 감동이라는 이야기를 생산한다. 그곳이 학교, 특히 기숙사 학교라면 그 감동의 깊이는 사뭇 다르다. 활짝 열린 교문마냥 활짝 열린 대지와 더 활짝 열린 자연의 싱그러움을 닮은 3월 학교 이야기는 그대로가 3월 수채화다.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 그 마음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딱 3월 첫째 주 지금 학교 모습이 아닐까. 운동장 가득 샘솟기 시작한 야생화를 닮은 학생들의 모습, 겨울을 저 멀리 밀어 내고 만개한 산수유,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매단 나뭇가지들! 이들의 모습을 인간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언어가 짧은 필자는 “푸릇푸릇”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올해도 자연을 닮은 푸릇푸릇한 학생들이 저마다의 교문을 열고 학교라는 큰 도화지에 들어섰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눈밭 같은 새 하얀 학교 도화지! 선입견과 고정관념, 어른들의 이기심 같은 모든 부정(不淨)들이 말끔히 사라진 그런 도화지! 저마다 큰 꿈을 가진 우리 학생들이 그 도화지에서 틀릴까봐 마음 졸이지 않고, 다른 아이들보다 못 할까 주눅들지도 않고 자신의 꿈과 희망과 행복을 마음껏 그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것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아니 이런 영화는 만들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만들어진다고 해도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 이유는 아직 어른 말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을 제외한 우리가, 이 사회가, 이 정부가 너무도 타락했기 때문이다. 자기 말만 난무한 시대에 대통령을 비롯한 모두가 자기 말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3월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과연 자기밖에 모르는 이 사회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입학을 축하한다는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래서 이 나라 교사에게 묻는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학창시절 선생님과 얼마나 다르십니까? 선생님의 작년 수업과 올해 수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되셨습니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꾸라고 말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나라 부모에게 묻는다! “부모님께서는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부모님께서는 자녀에게 희생과 배려와 양보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부모님께서는 자녀의 꿈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우십니까? 부모님께서는 점수와 숫자에 대해 또 얼마나 너그러우십니까? 부모님께서는 혹시 자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SKY 꿈을 꾸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 질문들은 십년 이상 매년 필자가 필자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분명 봄은 새 봄이다. 그런데 왜 필자는, 학교는, 사회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새 교육감이 자리를 했는데, 과연 우리 사회는, 우리 교육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자유학기(년)제, 고교학점제, 과연 그 다음은 무엇인가? 시험을 위한 똑같은 수업, 줄 세우기식 시험, 맹목적인 명문대 진학! 이것 말고 이 나라 교육에서 이야기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1979년 3월 학교와 너무도 똑같은 2019년 3월 학교! 정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하는가? 정말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필자는 오늘도 참회의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전략) 제 눈높이로 학생들을 평가하지 않게 하소서/제 생각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제가 앞장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뻔뻔함의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후략)” (졸시 “교사의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