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열차외교의 원조는 김일성이다. 1949년 10월 북중 수교 이후 김일성 주석은 1994년 사망할 때까지 특별열차를 이용해 중국을 40차례 방문했다. 러시아도 여러 차례 열차로 방문해 그의 열차 방문은 외교적 이미지로서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의 중국 방문에 대해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원하면 조선창 등 군사 및 경제시설을 둘러보도록 신경을 썼다. 당시만 해도 비행기 길이 지금 같지 않아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여러 면에서 편했을 수도 있었던 때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김정일 위원장도 중국 방문에는 꼭 열차를 탔다. 그의 열차 방문은 모두 7차례였다. 김 위원장의 첫 번째 방문은 2000년 5월이다. 집권 후 첫 방문인 만큼 장쩌민 지도부와의 상견례가 방문 목적이었다. 2011년 그의 마지막 방문에서는 김정은 후계 체제에 대한 지원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은 2011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할 때도 열차 안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북한 지도자와 열차의 끈질긴 인연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어쨌거나 김일성 부자의 열차 외교는 군사, 정치, 경제 등에서 성과를 냈다는 평가다.

김정은 위원장의 베트남 하노이 열차 방문이 또한번 집중 조명됐다. 비행기로 5시간이면 갈 거리를 60시간이나 걸리는 열차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구구한 해석이 쏟아졌다. 경호 등 안전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60시간을 열차로 가는 것이 결코 비행기보다 안전할 수 없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이유야 어쨌든 김 위원장의 열차 외교는 출발부터 시끌벅적했다.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의도된 선택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김 위원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열차 외교를 답습함으로써 얻는 대외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4천500㎞의 중국종단이 주는 중국과의 유대감 과시 좋은 효과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그의 중국종단 열차 대장정에 대한 세계적 시선이 이제 두 정상의 회담성과로 쏠리고 있다. 열차 외교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핵화로 이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우정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