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몇 년 전, 학위 논문을 심사할 때의 일이다. 한 장씩 읽어가다가 어느 한 모퉁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멈췄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명명백백한 표절의 흔적 때문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훑다보니 출처 밝히는 것을 깜빡했나보다 하고 있었는데, 감사해야 할 학생의 지도교수가, 오히려 투덜대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슨, 그 부분은 전체 중 지극히 소소한 부분이라 아무도 모르는데, 괜히 문제를 삼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박사 논문도 아닌 석사 논문에서 뭐 그리 소소한 것까지 따지느냐는 원망의 눈빛마저 보내는 바람에 적잖이 당혹해 했던 기억이 있다.

옛말에 ‘필작어세(必作於細)’라는 말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 63장에 나오는 말로,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사소한 것이라고 가벼이 여기게 되면 뒤에 큰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한비자가 ‘천 길 제방도 땅강아지나 개미의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고 백 척 높이의 고대광실도 아궁이 틈에서 나온 작은 불씨 때문에 타버린다’고 한 것이나, 공자가 일찍이 ‘군자는 광대함에도 도달하고 작고 정미한 것에도 진력하여 높고 밝음을 끝까지 추구하며 중용을 도로 삼는다.’고 한 것은 모두 ‘사소함’의 중요성을 설파한 말들이다.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쓴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에는 ‘1:29:300의 법칙’이 나온다. 이는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통계적 법칙으로, 핵심은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국 반캬오 저수지 붕괴 사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 2차 의료 감염 사건 등도 모두 인근 댐들의 저수량을 감안하지 않은 설계, 기술자들의 안전규칙 위반, 수술 전 올바른 방법으로 손 닦기 같은 사소함을 무시한 결과이다. 물론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거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고 보면, 작은 것에 집착하다 큰 것을 놓치는 경우도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100%의 실패를 막는 것은 1%의 실수, 곧 사소함이다.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은 이러한 디테일, 사소함에 강하다. 이 ‘사소함’은 단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하찮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큰 것을 보기 위한 첫 걸음이자 주변을 배려하는 ‘세심함’을 내포한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게는 자그마한 일이, 상대에게는 큰일이자 상처이고 평생의 아픔이 되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마시던 소주병을 베란다 밖으로 무심코 던진 게 길 가던 행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목숨을 앗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재미로 놀리고 때린 일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세상이다. 오래 전 사탕 한 개를 훔친 아이, 겨우 사탕 한 개쯤이야 하고 눈감아 준 것이 수십 년 후 은행털이범이 된 경우도 많이 본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 이 모든 것은 초기의 사소함을 크게 생각지 않은 탓들이다.

사소함을 차츰 무시하다보면, 나중엔 큰일을 사소함으로 여기는 대범함이 생기기도 한다. 힘겹게 번 돈으로 도와주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 큰 금액도 아니고, 그런 사소한 것쯤이야, 친구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등 임용 출제 기간에 개인 사유로 무단이탈해 놓고선 오히려 사소한 일이라며 문제없다고 발뺌하는 교육계 인사들…. 이들에게는 도덕적 양심이 없다. 따뜻한 심장이 없다. 모든 게 ‘사소한’ 까닭이다.

내게의 ‘사소함’이 남들에게 ‘큰일’이라면, 그것은 결코 ‘사소함’이 될 수 없다. ‘사소함’은 ‘나’가 아닌 ‘남’을 위한 배려이다. 그래서 ‘필작어세(必作於細)’에 담긴 사소함의 미학‘은 바로 다름 아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