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이렇게 쓴다. ‘고궁을 나오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 정말 얼마큼 작으냐” 우리는 얼마나 작은가, 그러한 우리의 앎은 또 얼마나 미약한가. 인간은 그렇게 미약하며, 인식은 더욱 미미하다. 모험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약함과 미미함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돈키호테의 정신이 필요하다.
시인 김수영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이렇게 쓴다. ‘고궁을 나오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 정말 얼마큼 작으냐” 우리는 얼마나 작은가, 그러한 우리의 앎은 또 얼마나 미약한가. 인간은 그렇게 미약하며, 인식은 더욱 미미하다. 모험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약함과 미미함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돈키호테의 정신이 필요하다.

△돈키호테의 에피스테메

‘돈키호테’(Don Quixote)는 17세기경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살았다. 그는 당대에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에 매료되어 스스로 기사 수련을 떠난다. 이 얼빠진 기사가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여 돌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과대망상증 환자나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왜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한 것일까? 푸코는 돈키호테를 ‘유사성의 에피스테메Episteme’와 ‘새롭게 발현되는 에피스테메’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이 말은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간단하다. 절대왕정 시대의 사람은 자연물을 왕에 비유하곤 했다. “짐이 곧 국가다”로 유명한 루이 14세가 ‘태양왕’이라 불린 이유는 그가 태양과 닮았다고 생각해서이다. 비록 태양은 아니지만 태양처럼 빛나는 왕이라 생각하자, 그가 태양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당대의 인식체계이며, 푸코는 이것을 에피스테메라 부른다.

그러니까 돈키호테는 세계를 기사 이야기로 환원해서 보았던 것인데, 기사 이야기가 곧 돈키호테의 에피스테메였다고 할 수 있다. 기사처럼 용맹하게 싸울 대상을 찾던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대한 괴물로 착각하며, 공주를 구하여 기사작위를 받고 싶었던 마음에서 수도사를 기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법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정한 인식체계에 붙들리면 그 대상의 실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식체계가 만들어내는 왜곡된 상을 보게 된다. 이것을 푸코는 ‘표상’이라고 부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나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은 이를 잘 드러낸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처해 있는 상황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몸담고 있는 세계의 체계다.

그런데 이 소설의 끝에서 돈키호테는 자신이 본 것이 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키호테가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좌충우돌 모험 덕분이었다. 돈키호테는 환상에 빠진 자신을 확인하고, 그런 자신을 구하려고 모험을 떠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모험이 없었다면 그는 환상에 머물러야만 했을 것이다. 무모한 모험이 돈키호테를 괴짜로 만들었지만, 그 모험 덕분에 돈키호테는 스스로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모험하지 않고 안주하기만 바란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인식체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돈키호테의 정신이 필요하다.

△콜라 초깊이 시추공 프로젝트

지구의 반경은 약 6천378km다. 지구 내부가 궁금하다. 지진은 왜 일어나며, 다이아몬드와 같은 귀한 광물은 어떻게 땅속에 묻혀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기면 사람은 호기심을 해소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아무 쓸모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구 내부가 궁금했던 구소련의 과학자들은 정말 땅을 파보았다. 이 프로젝트가 일명 지구속 ‘콜라 초깊이 시추공Kola Superdeep Borehole’이다.

그 결과는? 지하 9㎞까지 내려갔으나 예상치 못한 200℃ 이상의 고온으로 시추를 중단해야 했다. 콜라 초깊이 시추공은 1970년 5월부터 진행되어 20년 걸려 1989년 1만2천262m에 도달했다. 이 프로젝트의 최종목표는 1만3천500m를 돌파하는 것이었으나 땅속 온도가 180℃까지 올랐고, 이러한 온도에서 드릴을 냉각시킬 수 있는 기술이 없어 1992년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다시 2005년 새롭게 시추를 시작, 8천578m를 굴착했으나 예산문제로 끝나게 되었다. 지금 이곳은 폐허가 되어 방치돼 있다.

콜라 초깊이 시추공은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쓸데없는 프로젝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발칙하고 무모한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지구 내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각의 물리화학적 조성과 지구 내부의 열체계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땅밑에 수소가 다량 있다는 것도 처음 확인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지진파의 불연속이 나타나는 모호로비치칙Mohorovicic 불연속면에 대한 것이었다. 그동안 지질학자는 이 불연속면이 나타나는 원인이 화강암에서 현무암으로 암석 물질성분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한 결과 화강암이 변성암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온 때문에 화강암이 품고 있던 물을 분출하는 것을 밝혔다. 그래서 지구 내부에 수소뿐 아니라 많은 양의 물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질학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었는데 25억여 년 이상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시생대(始生代)의 바닥에 도달하여 당시의 지구상의 생태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기술은 석유나 천연가스 시추에 응용된다. 예전에는 개발이 불가능했던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석유자원의 시추에 필요한 핵심기술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우주탐사

2015년 7월, 미항공우주국NASA은 ‘행성 사냥꾼’으로 불리는 케플러우주망원경으로 지구와 유사한 환경에 있는 케플러-452bKepler-452b를 찾아냈다. 이 행성과 지구와의 거리는 1천400여 광년으로 중력은 지구의 두 배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지구보다 60% 정도 크고 다섯 배정도 무거워서 ‘슈퍼지구’라고 불리는 이 행성은 태양과 비슷한 항성주위를 385일 주기로 공전하며, 지구처럼 표면이 딱딱한 암석으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케플러-452b가 주목되는 이유는 여기에 생명체가 살 수 있어서다. 자연환경 조건이 비슷하다면 비슷한 생명체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구를 닮은 행성을 처음 찾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여섯 번째다. 도대체 우주는 얼마나 넓으며, 이 우주에는 얼마나 다채로운 일이 펼쳐지고 있단 말인가? 우주는 끝이 있는 유한한 공간일까, 아니면 끝이 없는 무한한 공간일까?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인간은 오만하고 편협하여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지구 수준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은하계, 나아가 우주 전체 수준에서 보자면 인간은 한낱 먼지처럼 미약하다. 인간은 미립자차원에서 보면 텅 비어 있다. 미립자 세계는 99.999%가 텅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몸 역시 한낱 허상이며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도 텅 비어 있긴 마찬가지어서 블랙홀 같이 막강한 중력 속에서 이 꽉찬 것 같은 지구도 탁구공 수준의 크기로 수축된다. 지구와 같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행성이 그 정도 크기로 줄어든다면 우리 몸은 얼마나 작아질까. 우리는 정말 티끌, 티끌만도 못한 것에 지나지 않을까.

이 티끌만도 못한 인간은 새로운 도전을 찾아 헤맨다. 날씨로 인한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날씨를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연구, 우주에 태양광발전소를 세워 지구로 송전하려는 프로젝트, 우주에 정거장을 설치하고 화성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화성식민지 개척 계획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날씨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공학은 실패를 밑거름 삼아 성공으로 간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공학에는 실패는 있어도 성공은 없고, 나아가 성공도 없지만 실패도 없다. 공학 속에 실패도 성공도 없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인간, 결국 남는 것은 인간이다. 무수한 실패 속에서도 인간은 도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사 실패가 불가피하더라도 우리는 배우게 될 것이다. 무모하면 무모할수록 그 무모함을 감당할 수 있는 실제적 공학기술이 점차 보완되어 완전한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