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운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며칠 전에 쓰고 나니, 그런 태움 말고 다른 태움을 생각하고 싶어졌다.

몇일 전에 쓴 태움이란 무엇이냐 하니, 영혼이 다 타버릴 때까지 괴롭힌다는 간호사 사회의 끔찍한 문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게 태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 사회만 그런 게 아니요 한국 사회 전체가 태움으로 마치 불타는 집에 들어앉은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쓴 것이다.

다른 태움이 있다. 어렸을 때 아이가 귀여워 못 견디겠으면 그 태움이라는 걸 해준다. 아빠가 아이를 등에 올려놓고 방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태움, 아이를 어깨 위 목에 걸치고 서울 남산을 보이냐고 묻는 태움, 어, 그만 좀 태워, 비행기에서 떨어지겠어, 하고 누군가 잔뜩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그만 좀 하라고 손사래를 치는 태움, 그런 태움 말이다.

생각건대, 우리는 서로 태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꾸 태워주고 또 태워주고 그래서 정말 비행기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스럽게 될 때까지 자꾸 태워주는, 옛날부터 우리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말썽 부리는 손자도 귀여워 못 견뎌, 그래도 저렇게 사지가 튼튼해서 돌아다니니 얼마나 좋아, 하고 없는 칭찬도 만들어 태워주는 문화를 이 메마른 세상에 다시 피워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게 농담이다. 우리는 농담을 제대로 못하는 세상에 떨어져 버렸다. 진중하고 무거운 것을 좋아하는 분들은 농담 즐기는 젊은이를 못마땅해 한다. 또 남을 깍아내리는 말을 농담이라고 해놓고 자신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을 유머 감각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뼈 있는 농담, 가시돋힌 농담은 유머가 될 수 없다.

유머란 뭐냐 하면, 상대방의 약점조차 관대하게, 따뜻하게 감싸 안은 농담이다. 유머는 풍자와는 용도가 다르다. 풍자는 권위 밑에 숨은 부끄러운 짓, 떳떳하지 못한 짓을 혼내주는 농담이다. 유머는 부족한 사람, 힘든 사람도 부추겨 주는 농담이다. 그렇다. 그런 유머는 바로 태워주는 농담이다.

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족한 점, 약점, 한계 같은 것을 갖고 있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자신에게 넘치는 것을 누군가들은 응당 못 갖고 있게 마련이다. 타고나기를 운 나쁘게 태어나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 누가 남의 탓만을 할 수 있으랴.

태워주는 말, 태워주는 행동,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서 잘한 일을 짚어내 부축해 주고, 아랫사람 만나서는 좋은 점을, 윗사람 만나서는 고마운 점을 서로 말해주는 관계, 이런 관계라면 많이 부족해도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태우지 말고 태워 주자, 우리 서로서로, 이 풍진 세상을 태워주며 살자.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