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식특집기획부장
홍성식
특집기획부장

다시 설날이 코앞이다. 이젠 세뱃돈을 받는 게 아니라 줘야 할 처지고, 설빔을 얻어 입을 나이도 지났지만 오래 보지 못한 피붙이를 만나는 명절은 즐겁다. 이 ‘즐거움’이 남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할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그러나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설과 추석을 포함한 명절에 느끼는 즐거움이란 대부분 남자들만의 것이었다.

시장에서 고른 생선을 굽고, 밥을 안치고, 산적을 꿰고, 국과 나물을 준비하는 부엌일은 모조리 할머니와 어머니, 여동생과 누이의 몫이 됐다. 전날 저녁부터 설 아침까지 며느리들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수습할 시간도 없었다.

탕국 간이 짜거나, 데친 나물이 시아버지의 입맛에 맞지 않을 때면 떨어질 시어머니의 불호령에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 남자들은 뭘 했을까. 주방을 바삐 오가는 여자들의 발걸음을 본체만체 전복구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TV 뉴스를 들으며 “정치가 엉망이니” “경제가 걱정이니” 따위의 하나 마나 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설 제사가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 풍경. 여자들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밀려드는 설거지와 수차례 거듭되는 손님상 차리기. 그 시간 남자들은 느긋하게 음복술을 마시며 취기에 젖어가고. 명절에 사용될 모든 음식을 준비하고도 “여자들은 제사상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있으라”는 말에 부엌에 쪼그리고 있던 어머니와 숙모들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다.

남자들이 식사를 마친 뒤 식은 밥과 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허기를 끄던 여자들. 한 세대 전 여성들에게 설이란 대체 뭐였을까.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생하는 날? 남자 수발드는 것으로 일관하는 날? 거창하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건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며 불합리한 관행이다.

귀족과 농노, 압제자와 민중 사이에 존재했던 지배와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시스템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엄존했던 시대. 그것이 여실하게 드러났던 지난날 명절 풍경. 우리는 그 시간을 아프게 지나오며 새로운 시대를 모색했다.

평등이란 귀한 가치다. 성별의 차이가 평등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돼선 곤란하다. “명절 준비는 누구의 몫이다”라는 낡은 레토릭으로 굴종을 강요할 권리는 남성에게도 없고 여성에게도 없다. 평등과 공정이란 가치의 구현은 거창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남녀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위해 남자와 여자가 함께 수고스러움을 나누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 또한 평등한 세상,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의 디딤돌로 역할하지 않을까.

봉건 군주건, 조선 양반이건, 독재권력이건 지배자의 필요에 의해 불합리하게 유지돼 온 억압의 구조와 부당한 질서에 대한 거부 없인 역사 발전도 없다.

인류가 긴 투쟁을 통해 쟁취해가고 있는 ‘남녀평등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지.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변화 속에서 발전한다. 200년 전을 살았던 독일 철학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젠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여필종부(女必從夫)를 대놓고 말하는 이들이 드물다. 앞으론 더 적어질 게 분명하다. 이것은 ‘발전하는 역사’인 동시에 재론의 여지없이 바람직한 일.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남동생이 누나와 함께 부침개를 굽고, 여동생과 오빠가 사이좋게 밥상을 차리며, 아버지와 숙부가 서툴지만 소매를 걷고 설거지를 하는 명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든 할머니와 어머니의 환한 웃음이 마당과 마루 가득 넘치는 명절.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런 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남녀를 불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