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인의 향기’의 한 장면. 알 파치노는 시각 장애로 퇴역한 장교 프랭크 역할을 맡아 훌륭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는 도나가 사용하는 고급비누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의 후각은 개처럼 예민하다. 프랭크는 당시 상류층의 생활 패턴을 알고 있으며, 여성의 성향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프랭크는 능숙하다. 여자에 대해서는 물론 탱고에 대해서도 능숙하다. 도나는 미숙하다. 남자에 대해 미숙하며 물론 탱고에 대해서도 미숙하다.

이들이 무대로 걸어 나오자 곧바로 음악이 뒤따라 나온다. 도나가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도나는 프랭크를 무대로 안내했고, 프랭크는 도나를 무대 속으로 안내한다. 프랭크는 청각과 후각과 촉감으로 무대를 본다. 하지만 도나는 오로지 눈으로만 본다. 그녀의 시신경은 구경꾼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다. 그래서 그녀는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음악이 시작되고 탱고가 시작되자 도나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한다. 춤을 추던 프랭크가 도나를 갑자기 뒤로 젖혀졌을 때, 도나의 웃음은 ‘아. 쪽팔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시 젖혀질 때 그녀는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이제 ‘아!’라고 탄성한다. 그녀는 조금씩 음악 속으로 들어와 음악이 되고 탱고가 된다. 음악이 격정을 향해 나아갈 때, 그녀는 더 행복해지고 더 더 흥분한다.

△프랭크

원곡은 간발의 차이(Por una cabeza)라는 뜻으로 경마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얼빠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남자는 한 경주마에게 자신의 재산을 몽땅 걸었다. 하지만, 말머리 하나 차이로 지고 만다. 이 남자는 또 돈이 생기면, 그 돈을 경마로 탕진할 것이다. 원곡에서 말은 여성으로 비유되는데 여성에게 매혹되듯 그 경주마에 현혹되어 돈을 걸게 되었다고 남자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데 이 노래의 말미에서 비유로만 등장하던 여성은 어느 순간,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를 뒤엎고 전면에 등장한다. 보조관념이었던 여성이 원관념의 위치로 격상되는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경주마에 돈을 탕진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돈을 탕진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프랭크 역시 도나와의 탱고가 끝나고 절망의 깊은 계곡으로 추락한다. 그 이유는 도나의 남자친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도나에게 프랭크와의 춤은 해프닝 정도였으나 프랭크에게 그것은 삶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프랭크의 권총 자살이 이 영화의 진정한 결말이다. 뒷부분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이 영화를 위해서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인생과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어요. 단순하죠. 실수는 탱고를 더 훌륭하게 만들죠. 실수로 스텝이 꼬이면 그게 바로 탱고죠(No mistakes in the tango, not like life. It’s simple. That’s what makes the tango so great. If you make a mistake,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탱고는 삶과 다르지 않다. 실수를 씨실로 삼고 꼬임을 날실로 삼는 것, 그것이 삶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삶‘만’ 꼬여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맹인이 되면서 그의 삶이 꼬여버렸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전부터 삶은 꼬여 있었고, 그를 맹인으로 만든 폭발사고는 그 꼬인 삶의 부분이다. 그런 삶 속에서 능숙이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능숙함에 대한 맹신, 이로부터 삶의 비극이 시작된다.

△프랭크와 도나

프랭크는 탱고를 통해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을 복원하려 한다. 그 복원하려는 노력 속에서 과거는 유성과도 같이 더 멀어져 영원히 사라질 뿐이다. 과거의 탱고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하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궁정요리사의 말을 기억하여야 한다. 왕은 전쟁 중에 먹었던 산딸기 오믈렛을 궁중요리사가 재현해 주길 원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믈렛의 재료가 아니라 분위기다.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25면)

왕의 오믈렛은 아우라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한 재현은 궁중요리사의 능력을 초과해 있다. 과거의 자신을 완벽히 재현하려는 욕심은 늘 죽음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맹인이 된 이후의 프랭크의 삶은 돈키호테의 기행에 대응된다. 여전히 능숙하다고 믿는 프랭크는 자신의 자살을 심각한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면 도나의 미숙함은 “망각의 땅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우를 막아내려는 기병의 전진”이다. 미숙한 그녀는 미숙하다. 미숙한 자에게 자살은 하등의 의미도 기대할 가치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그녀의 미숙함은 자살의 무게마저 무화시키는 완벽한 염세며 완벽한 허무다.

언제든 과거를 파괴할 수 있는 자들, 추억에서 아우라를 제거하는 자들, 그들은 미숙한 자들이며, 그들은 그러한 파괴를 통해서 틈을 만든다. 메시아가 들어왔었던 그 틈을 말이다.

△인생은 연기다, 라는 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와 못하는 배우를 구별하는 기준은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배우는 대사를 알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한껏 즐거운 채로 외출을 준비할 때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저 전화벨 소리는 주인공의 행복한 오늘을 아니 나아가 삶 전체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것이다.

배우는 그 전화가 언제 울릴지를 알고 있으며, 그 전화의 내용까지도 알고 있다. 전화벨에 집중할 때 배우의 행동은 즐거움에 매몰되지 못한 채 전화벨만을 기다리게 되고, 그는 현관의 문에 이르기 전에 이미 전화벨이 울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발걸음은 부자연스럽다. 정작 전화벨이 울려서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은 갑작스러움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알고 있는 자의 돌아섬이다.

그러나 훌륭한 배우는 순간에 매몰된다. 즐거움에 매몰되고 즐거움에 매몰되어 관객을 그 즐거움 속으로 동참케 한다. 그러할 때 전화벨은 동일한 기계음이라 할지라도 그 즐거움을 산산이 깨뜨리는 벽력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훌륭한 배우는 전화가 올지 몰랐다는 듯이 뒤돌아볼 수 있으며, 어떤 까닭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수화기를 들어올린다. 그러므로 훌륭한 배우란 대사를 잃어버리는 자이며,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순간을 순간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인생은 연기다, 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대략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어나면 자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과 내일의 일이 그런 식으로 축적될 때 대략 어떤 결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훌륭한 인간이란 바로 앞으로 다가올 일을 잊어버리는 자다. 이 점심은 예견되지 않은 점심이며, 최초로 경험하는 점심으로 다가와야 한다. 나의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삶 속에 매몰되어야 한다. 순간만을 살아가는 일, 알고 있으나 모르는 것처럼 여기는 일, 현재 속에 매몰되는 일, 우리가 배우에게서 배워야할 기술은 바로 이것이다.

심슨 가족의 리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물론 인생은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해.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요령은 순간에 주어진 몇몇 완벽한 경험들을 즐기는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심슨의 대사는 이렇다. “재미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만두고 즐기는 거야.”